배우의 가장 큰 덕목 중 하나는 다양한 얼굴이다. 주어진 캐릭터에 맞춰 새로운 얼굴로 대중 앞에 서는 배우가 매력적인 법이다. 정용주는 연극 '에쿠우스'에서 알런 스트랑 역을 맡아 인간 내면의 욕망과 갈등을 다층적으로 보여줬다. 여섯 마리의 말과 상호작용하며 알런의 심리를 표현하는 장면마다 관객의 시선이 집중됐고, 주요 장면이 끝날 때마다 객석에서는 자연스러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에쿠우스'는 1973년 영국 초연 이후 50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아 온 명작이다. 인간 내면의 억눌린 욕망과 광기를 탐구하며 토니상과 뉴욕비평가상을 수상했으며, 국내에서도 1975년 첫 공연 이후 꾸준히 무대에 올려졌다. 작품은 여섯 마리 말의 눈을 찌른 소년 알런 스트랑과 그를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 마틴 다이사트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년의 광기와 욕망을 관찰하는 다이사트의 시선과, 사회적 규범을 강조하는 알런의 부모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극 전체를 관통하며, 인간 내면의 자유와 억압, 욕망과 규범 사이의 첨예한 긴장을 날카롭고 철학적으로 탐구한다.
정용주는 이번 캐스팅에서 3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알런 역에 최종 합격했다. 다수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며 연기 스펙트럼을 확장해온 그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그만큼 이번 공연에서 보여주는 그의 연기와 존재감은 더욱 의미가 크다.
정용주는 첫 등장부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배우들이 구현한 여섯 마리 말과 상호작용하며 알런의 내면 세계를 드러냈다. 말들에게 안겨 몸을 쓰다듬는 장면에서는 자유와 억압, 욕망과 혼란이 교차했고, 작은 손짓과 시선 하나에도 알런의 내적 갈등이 실렸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도 배우들의 호흡과 움직임은 극의 긴장감을 유지하며, 관객들은 극과 배우의 호흡에 몰입했다.
연기 디테일 또한 눈에 띄었다. 마이크 없이 또렷하게 들리는 대사, 흔들림 없는 발화, 변화무쌍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구현했다. 반항적이면서 부끄럽고 순수한 소년, 신을 향한 집착과 욕망으로 갈등하는 청년 등 다층적인 인물상을 한 몸에 담았다. 공연 내내 관객은 알런의 내면을 다이사트의 시선으로 관찰하며, 사회적 규범과 억눌린 욕망 사이의 갈등을 함께 체험했다. 이렇게 쌓인 긴장감은 후반부 알런의 대사 "나의 죄를 신이 보는 게 두려워 신의 눈을 찔렀다"에서 절정에 달했다. 인간 본성과 욕망, 신성에 대한 질문이 담긴 이 장면은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며 공연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사유에 잠기게 했다.
정용주는 알런을 단순한 광인으로 그리지 않았다. 엄격한 부모 아래서 자란 소년의 자유를 향한 갈망과 욕망을 ‘말’이라는 존재를 통해 투영했다. 달리는 말에서 느끼는 해방감, 말의 눈동자에서 읽는 순수한 열망, 그 욕망이 숭배와 파괴로 이어지는 과정까지 세밀하게 표현하며 자신만의 알런을 완성했다.
무대 연출은 절제돼 있었다. 작은 공간과 최소한의 장치, 군더더기 없는 조명과 공간 활용은 배우들의 연기를 돋보이게 했고, 비워진 무대는 오히려 관객이 배우들의 움직임과 호흡에 집중할 수 있는 장치가 되었다. 배우들의 시선과 몸짓 하나하나가 공간을 가득 채우며 극 전체의 긴장감을 높였고, 관객들은 극의 몰입 속에서 인물들의 내적 갈등과 감정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
관객 반응 또한 눈길을 끌었다. 긴장감과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마다 객석은 숨죽였고, 강렬한 장면이 끝날 때마다 탄성과 박수로 호응했다. 배우들의 호흡과 연기가 무대와 관객을 촘촘히 연결하며 극의 몰입도를 높이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에쿠우스'는 인간 내면의 심연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정용주가 그 심연 속에서 보여준 알런의 여정은 관객에게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공연은 내년 2월 1일까지 예그린씨어터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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