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정차돼 있던 흰색 제네시스 GV80 뒷자리에 탑승하자 운전자 없이 차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뛸 수밖에 없었다. 영상으로 봐오던 자율주행 기술에 대한 신뢰는 있었지만 텅 빈 운전석을 마주하자 긴장감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불안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점점 속도를 내더니 이내 다른 일반 차량들이 빠르게 달리는 도로 한가운데로 진입했다. 옆차선을 달리던 차량이 갑자기 끼어들자 부드럽게 속도를 줄이며 충돌을 피했다. 로터리 구간은 부드럽게 돌았고 차선을 바꿀 때도 흔들림 없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거친 급제동도 없었다. 무단횡단하는 보행자가 갑자기 튀어나왔을 때도 상황을 안전하게 넘겼다. 인근 서부운전면허시험장을 드나드는 초보 운전자들이 탑승한 차량과 비교하면 운행과 대처가 훨씬 노련해 보였다.
이 차는 국내 유일의 레벨4 자율주행차다. 스타트업 라이드플럭스의 첨단 자율주행 소프트웨어(SW)가 전면 적용됐다. 기자의 시범 탑승에 동행한 라이드플럭스 관계자는 “자율주행차의 경우 0~3레벨에서는 운전석 안전요원이 필요하지만 레벨 4부터는 무인 주행이 가능하다"며 "그간 상암 자율주행 시범운행지구 3.2㎞ 구간을 1만 회 이상 달렸지만 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고 자랑했다. 이어 “안전한 운행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다”며 “향후 주행 구간을 확장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라이드플럭스, 국내 유일 레벨4 자율주행 실증
사실 한국의 자율주행산업은 미국이나 중국에 비해 성장 속도가 더디다. 각종 규제와 지원 부족 탓에 자율주행 기술을 가진 기업들이 투자 유치 단계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관련 기업들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서울에서 도심 레벨4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라이드플럭스는 LG전자(066570) 출신인 박중희 대표와 윤호 최고기술책임자(CTO) 등이 의기투합해 2018년 설립한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개발 스타트업이다. 라이드플럭스는 인지, 측위, 예측, 계획, 제어, 원격운영 등 레벨4 자율주행에 필수적인 소프트웨어를 풀스택으로 개발하고 있다. 창업 초기부터 자율주행 상용화에 유리한 테스트베드를 전략적으로 선정해 단계적으로 실증을 추진해왔다. 특히 제주에서 도심 일반도로, 고속화도로, 해안도로, 산간도로 등 다양한 환경의 데이터를 학습했다. 이를 통해 혼잡한 도심 도로 및 비, 눈, 안개 등의 악천후에서도 자율주행이 가능한 기술력을 갖고 있다. 핵심 기술 분야에서 뛰어난 전문성을 갖춘 인재들도 확보했다. 임직원 150여명 가운데 100명 이상이 기술 직군이다. 라이드플럭스는 부산 오시리아 관광단지, 제주에서도 자율주행 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라이드플럭스는 에이티넘인베스트(021080)먼트, 쏘카(403550), 유안타인베스트먼트, 한국투자파트너스, 뮤렉스파트너스, IBK기업은행, 아이엠투자파트너스, 프렌드투자파트너스, 한국투자증권, 엔베스터 등에서 투자를 유치했다. 누적 투자 유치금은 552억 원 규모다. 내년 국내 증시 상장을 목표하고 있다.
에이투지·카카오(035720)·네이버 등도 연구개발
또다른 스타트업 오토노머스에이투지는 지난달 23일 서울 청계천 일대 자율주행 셔틀 운행을 시작했다. 오토노머스에이투지는 최근 일본 종합상사 가네마쯔 주식회사와 자율주행 기술 공동 사업화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일본 시장 진출도 추진하고 있다. 싱가포르와 아랍에미리트 등 해외에서도 국가 단위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오토노머스에이투지와 라이드플럭스는 서울특별시버스운송사업조합, 대한교통학회, SK스피드메이트와 'K-자율주행 상생발전 MOU를 체결했다. 롯데이노베이트(286940)도 같은 달 22일 제주도에서 자율주행 노선버스의 시범 운행을 시작했다.
카카오모빌리티는 자율주행 기반 조성에 속도를 내고 있다. 자율주행 시스템 운영과 관제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카카오모빌리티는 서울시 최초의 차량호출형 서비스인 ‘서울자율차’를 운행하고 있다.
카카오모빌리티와 전국택시운송사업조합연합회는 최근 ‘미래형 택시 산업 전환을 위한 자율주행’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것도 주목을 받고 있다. 법인택시 업계를 주축으로 한 주요 택시 단체인 전국택시연합회와 도입 단계부터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카카오모빌리티는 스타트업들과도 협업하고 있다. 오토노머스에이투지 및 에스더블유엠(SWM)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업무 협약을 체결했다. 박창수 카카오모빌리티 자율주행개발팀 테크리더는 지난달 24일 “다양한 파트너사들과 함께 협력해 안정적인 자율주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동시에 기술 발전을 이끄는 운영 플랫폼을 만들고 있다”며 “상생의 자율주행 생태계를 만들어가겠다”고 강조했다.
네이버는 올해 초 자율주행 솔루션 개발 기업 웨어러블에이아이에 투자했다. 이 기업은 국내 1세대 자율주행 스타트업 '토르드라이브' 공동창업진이 재창업했다. 네이버는 최근 라이다 기술 기업 모빌테크와 업무협약을 체결해 사우디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자율주행 시뮬레이션 스타트업 모라이와 시뮬레이션 사업 확산을 추진하고 있다. 제2 데이터센터 ‘각 세종’에서도 자율주행차를 운영하고 있다.
현대차(005380)그룹은 2027년 말까지 레벨2+(플러스) 자율주행을 적용할 예정이다.
정부 규제 혁파 기대감…"여객자동차법 개정 필요"
고군분투 중인 자율주행 테크 기업들은 정부의 산업 진흥책을 기대하고 있다. 특히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약속한 자율주행 산업 진흥을 위한 규제 혁파가 실행되길 바라고 있다. 자율주행 학습 목적 원본 영상데이터 활용 허용, 자율주행 시범 운행을 위한 실증 지역 대폭 확대 등이 대표적이다. 국토교통부는 이달 1일 경북 경주에서 자율주행 산업 발전 방안을 논의하는 ‘자율주행자동차 시범운행지구 광역 협의체’ 회의를 열었다. 이번 회의에는 전국 17개 광역 시도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관계부처가 참석해 규제 개혁 방안을 논의했다.
이런 가운데 일각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국내 자율주행 시장의 발전을 위해 모빌리티 산업의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 거침 없이 치고 나가고 있어 기술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어서다. 실제 알파벳(구글 지주사)의 자율주행 계열사 웨이모는 올해 7월 운전자 없는 로보택시 서비스 주행거리가 1억 마일(1억 6000만㎞)을 돌파했다고 공개했다. 우버는 웨이모를 비롯해 중국 비야디(BYD)와도 협력하고 있다. 중국 바이두는 미국 승차공유 기업 리프트와 영국과 독일에서 자율주행차를 운행할 예정이다. 특히 중국 포니에이아이는 한국 기업 젬백스링크와 합작법인 포니링크(064800)를 세우고 경기 성남 등에서 시범 운행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달 2일 보고서를 통해 “준비 없이 자율주행택시가 도입되면 우리나라 택시 시장 구조가 급격히 바뀌고 이 과정에서 택시 기사를 포함한 관련 종사자들의 피해가 커져 사회적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며 “도입 여건이 상대적으로 양호하고 기존 택시 면허 매입 부담이 적은 지방 중소도시부터 여객자동차법 등 규정을 고치고 기존 택시면허 매입이나 이익공유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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