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3500억 달러, 일본의 5500억 달러. 몇 달 전만 해도 정부 안팎에서는 “대미 투자는 일본보다 낮고, 대미 무역흑자에 비하면 과도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컸다. 그러나 지금 이 논리는 설 자리를 잃었다. 9월 4일 일본이 미국과 체결한 양해각서(MOU)에서 ‘45일 이내 현금 입금 펀드 투자’ 방식이 공개되면서 한국의 약속이 결코 가벼운 숫자가 아님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일본은 상황이 다르다. 상품수지는 적자여도 경상수지는 흑자다. 막대한 해외 자산에서 나오는 이자·배당 수입, 즉 본원소득수지가 이를 떠받친다. 미국에만 이미 8000억 달러 가까이 투자했고 무엇보다 미일 간에는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있어 달러 조달에도 제약이 없다. 일본이 관세 협상을 투자로 전환한 것은 합리적 선택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반면 한국의 대미 누적 투자액은 2400억 달러 남짓에 불과하다. 일본은 기존 투자 대비 70%만 늘리면 되지만 한국은 150% 이상을 불려야 한다. 지난해 해외 순저축에 해당하는 금융계정(952억 달러)을 기준으로 잡아도 미국 투자에는 3년 8개월을 꼬박 바쳐야 한다.
한국은 여전히 ‘수출국형 모델’에 머물러 있다. 국내총생산(GDP)에서 무역 비중이 한국은 90%에 육박하지만 일본은 40% 수준이다. 일본의 자동차 수출은 산업 생태계 유지 차원이지만 한국은 수출 자체가 생존의 근간이다. 일본의 대미 협상이 한국의 벤치마크가 된 것이 뼈아픈 이유다. 비유하자면 ‘건물주’ 일본을 ‘월급쟁이’ 한국이 따라가야 하는 형국이다.
한국은 현실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현금 투입 비율을 낮추거나, 기한을 늘리거나, 투자 용도에 대한 결정권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협상 여지를 만들어야 한다. 통화스와프 확보도 도움이 되겠지만 이는 연 4%가 훌쩍 넘는 이자를 치러야 하는 달러 부채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 경제학자 딘 베이커가 제안한 “차라리 관세 25%를 받아들이라”는 급진적 대안이든, 일부 관세 상향 절충안이든 다각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산술적 계산보다 분수를 아는 것이다. 한국 경제의 체질을 냉정히 직시한 가운데 실현 가능한 대안을 찾는 지혜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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