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0만 명에 가까운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민들을 14시간 동안 암흑으로 밀어넣은 스페인 대정전을 지켜본 유럽 지역의 석학들은 재생에너지 보급 속도에 비해 전력망 투자가 미흡했던 점이 대정전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한국이 같은 문제를 겪지 않기 위해서는 에너지믹스 다양성을 유지하고 전력망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너지 문제를 다룰 때는 이념보다 과학에 입각해 판단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미겔 데 시몬 마르틴 레온대 전기공학시스템자동학과 교수는 7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근 스페인 정부가 재생에너지에 대해 강력한 지원을 하면서 이에 대처할 전력망의 실제 용량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안토니오 고메스 에스파시토 세비야대 전기공학과 교수도 “현재 규정은 재생에너지 발전원은 수력뿐이던 25년 전과 같은 수준”이라며 “시스템을 신속히 개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미앵 에른스트 리에주대 전기공학 및 컴퓨터과학과 교수는 “정전 초기 국제 연결망 부족으로 전력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며 “유도 전력도 충분하지 않아 전압 제어에 실패하면서 결국 대정전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정전 당일 첫 이상 현상이 발생한지 3.5초만에 프랑스 전력망이 차단되면서 전압과 주파수가 급격하게 불안해졌다는 이야기다. 알바로 데 라 푸엔테 길 레온대 전기공학시스템자동학과 교수는 “관성이 높은 시스템은 충격을 흡수해 전력망 운영자에게 충분한 대응 시간을 준다”며 “하지만 전자 장치로 연결된 태양광 및 풍력 발전소는 관성을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이베리아 반도 전력망의 높은 재생에너지 의존도가 화를 키웠다는 주장이다. 반면 에스파시토 교수는 “관성 부족 외에 다양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며 “전압을 제어하는데 필요한 무효 전력의 잘못된 배분이 근본적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재생에너지 발전의 본질적 한계보다 스페인 전력 당국의 전력망 관리 능력 부족에 초점을 맞춘 의견이다.
이들은 한국에서도 재생에너지 확대가 불가피한 흐름이 될 것이라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한반도의 지리적 여건이 유럽에 비해 불리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에른스트 교수는 “한국은 태양광 발전 설비를 설치할 공간이 스페인에 비해 부족한데 비해 전력 소비량이 상당히 많아 재생에너지를 도입하기 어려운 여건”이면서도 “현재 목표치는 예외적인 수준은 아니므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에스파시토 교수 역시 “한국은 인구밀도가 높고 수력 발전량이 부족해 전력 시스템이 완전히 탈 탄소화되기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들 것”이라면서도 “해상풍력 발전이 성숙되고 충분히 저렴해지면 전력망 탈탄소화를 위한 유망한 대안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푸엔테 길 교수도 “한국은 산업 수요와 인구 밀도가 높으니 2040년까지 재생에너지 비중 50~60% 달성을 목표로 할 만할 것”이라며 “80%를 넘어서면 간헐성으로 인한 과제가 크게 증가하므로 다각화된 에너지믹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태양광과 해상풍력을 중심으로 재생에너지 발전소를 빠르게 늘리려는 한국 정부 역시 스페인의 교훈을 염두에 두고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른스트 교수는 “관성력이 높은 동기 발전소의 비중 30%를 유지해야 계통 안정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기 발전소는 수력·화력·원자력발전소와 같이 전력망 주파수와 같은 주파수로 작동하는 터빈형 발전소를 의미한다.
호세 루이스 도밍게스 가르시아 카탈루니아에너지연구소(IREC) 전력망 부문 총책임은 “계통 연계를 적절히 계획하는 것은 물론 전력망 장비를 충분히 업데이트해 어떤 상황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푸엔테 길 교수는 전력망 업데이트와 함께 △대규모 에너지 저장 시스템 구축 △유연 전력 요금제 도입 △발전원 다각화 △인접국과 전력망 연계 등을 정책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에너지 정책은 가치중립적인 시각에서 다뤄야 한다는 조언도 제기됐다. 마르틴 교수는 “기술 전문가를 믿고 이념이나 정치에 휘둘리는 결정을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한국 정부에 드리고 싶다”며 “모든 상황에 작동하는 만능 모델은 없다. 목표를 향해 유연성을 발휘하며 꾸준히 발전하는 것이 전력망 관리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인터뷰에 응한 전문가 대부분은 원전이 전력망 안정성을 높이는 기저 전원으로서 훌륭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푸엔테 길 교수는 “원전은 탄소 배출이 없을 뿐 아니라 주파수 안정성을 높이는 데도 기여한다”며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유효한 선택지”라고 설명했다. 에른스트 교수도 “유럽 전력망의 관성은 프랑스의 대규모 원자력 발전소에 의해 대부분 보장되고 있다”며 “원자력은 분명히 전력망 안정성을 보장한다”고 답했다.
가르시아 총책임은 “현재 전력망은 고전적인 관성 전원에 적합한 방식”이라며 “같은 관성 전원이라도 원전이 화력발전소보다 규모가 크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부연했다. 같은 관성 전원인 화력·원자력 발전소 중 원자력 발전소가 탄소 배출이 없을 뿐 아니라 설비 용량이 커 전력망 안정성에 더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만 원자력 발전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마르틴 교수는 “원자력 기술이 에너지 믹스에서 나름의 자리를 차지한다”면서도 △높은 건설 비용 △긴 시운전 시간 △사고 위험 △폐기물 문제 등의 단점이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스파시토 교수는 “스페인 대정전의 원인을 관성 부족으로 요약할 수만은 없다”며 “기존 원전 설비는 최대한 활용해야겠지만 소형모듈형원자로(SMR)과 같은 차세대 방식은 재생에너지에 비해 경쟁력이 있는지 입증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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