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핀트로닉스(Spintronics)는 전자의 전하뿐 아니라 ‘스핀(회전 방향)’이라는 양자 특성을 활용해 정보를 처리하고 저장하는 기술이다. 쉽게 말해 자석에 전류를 흘려 보냈을 때 나타나는 변화를 정교하게 제어해 데이터를 읽고 쓰는 방식을 한 단계 발전시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인 데이터 저장·처리 성능을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어 차세대 반도체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반도체 강국인 한국에서 스핀트로닉스 연구 열기는 뜨겁다. 올해 들어 국내 연구기관들은 의미 있는 성과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아주대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공동 연구팀은 전자의 스핀과 전하가 서로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스핀-전하 분리 현상’을 실제 물질에서 확인했다. 연구팀은 전기가 잘 통하다가 특정 조건에서 절연체로 변하는 ‘전하밀도파 전이’ 상황에서도 이 현상이 지속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는 스핀과 전하를 독립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특성을 이용해 양자컴퓨터·양자통신 등 차세대 기술에 필요한 새로운 양자 정보 소재를 개발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성과다.
KAIST와 미국 아르곤국립연구소 공동 연구팀은 자성체(YIG)와 초전도 공진기를 결합한 ‘포톤-마그논 하이브리드 칩’을 제작해 양자 수준에서의 신호 전송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빛의 입자인 ‘포톤’과 자성체 내부의 스핀파 입자인 ‘마그논’이 양자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이 기술은 초저전력·고효율의 양자컴퓨팅과 양자통신 하드웨어 개발에 필수적인 기반 기술로 평가된다.
국내 연구진은 이 외에도 전기 전도성이 뛰어난 그래핀과 스핀 제어 특성이 우수한 전이금속 칼코게나이드(TMD) 소재를 결합해 스핀 정보와 전기 신호 간 변환 효율을 정밀하게 제어하는 기술을 구현했다. 이를 통해 스핀트로닉스 소자의 저전력·고성능화 가능성을 높이며 연구 영역을 메모리뿐 아니라 센서·로직·양자소자 등 다양한 응용 분야로 확장하고 있다.
스핀트로닉스 산업은 아직 초기 단계지만 성장 잠재력은 크다. 시장조사 기관 퓨처마켓인사이트에 따르면 전 세계 스핀트로닉스 시장은 2025년 약 131억 달러(약 18조2000억 원)에서 2035년에는 약 986억 5000만 달러(약 137조 2000억 원)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연평균 성장률(CAGR)은 15.8%에 달한다. 자성저항메모리(MRAM), 스핀전달토크(STT) 장치, 스핀 기반 로직 회로 등 스핀트로닉스 기반 장치 수요 확대가 시장을 키우는 핵심 동력으로 꼽힌다.
특히 메모리반도체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은 주목받는 핵심 시장이다. 삼성전자는 2018년 세계 최초로 28나노 STT‑MRAM 양산에 성공해 산업·자동차용 MCU 등에 적용했으며 현재 차세대 eMRAM 개발을 이어가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차세대 메모리와 AI 가속기용 캐시 메모리 적용을 목표로 MRAM 개발에 나서고 있다. 이 기술이 본격 상용화되면 기존 반도체 공정과 호환성을 유지한 채 새로운 고부가가치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여기에 정부의 국가전략기술 지정, 세제 지원, 연구개발(R&D) 투자 확대가 더해지면 산업화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퓨처마켓인사이트는 “2035년에는 스핀트로닉스 기술이 양자컴퓨팅, 친환경 제조 공정과 에너지 절감형 장치 개발에 적용될 것으로 보이며 의료 영상·보안 데이터 암호화 등 다양한 분야로 확장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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