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위기를 절대 헛되이 보내선 안 됩니다. 그런 위기는 당신이 이전에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라는 뜻입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이었던 람 이매뉴얼은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를 수습하며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다는 발상을 제시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재난처럼 찾아오지만 이를 수습하는 방식에 따라 새로운 판을 설계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소셜 미디어가 확산하면서 더 많은 위기가 실시간으로 발생하고 그 전파 속도는 더욱 빨라지지만 많은 기업들의 대응은 안타깝게도 구태의연하다. 일단 사고를 쉬시하다 며칠을 보낸다. 그 사이 소셜미디어에 수많은 추측이 무성해진다. 어느 날 검은 이미지를 띄운 사과문 한 장이 게재된다. 한 문장 한 문장 법무팀의 철저한 검수를 거친 사과문 속에 인정과 사과는 없다. 대중은 기다린 만큼 실망도 크다. 이를 마주하는 대중들은 사과문의 의도를 꿰뚫어보는 감식안이 생겼다. 결국 안 하느니만 못하는 사과문으로 남는다.
전광판에서 시작된 ‘콜드플레이게이트’
이달 중순 한 기업에도 익숙한 재난이 벌어졌다. 지난 16일(현지 시간)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서 열린 콜드플레이 콘서트에서 전광판에 관객석의 커플을 비추는 ‘키스 캠’에 한 커플의 애정행각이 잡힌 데서 시작됐다. 일반적으로 애정 공세를 더욱 이어가는 다른 커플과 다르게 눈에 띄게 당황해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빠르게 소셜미디어 바이럴을 탔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이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둔 데이터 분석 및 인공지능(AI) 워크플로우 서비스 업체 애스트로노머(Astronomer)의 최고경영자(CEO)와 최고인사책임자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기혼이었다. 난데 없이 전 세계인이 사내 불륜 커플을 목격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흥분했다. ‘콜드플레이게이트’라는 말까지 나왔다. 흥분한 대중이 맹공을 퍼부은 곳은 커리어 기반 소셜 미디어인 링크드인의 회사와 개인 계정이었다. CEO와 임원의 불륜으로 회사 전체가 스캔들의 중심이 돼 2018년 설립된 이 스타트업은 창사 이래 7년 만에 최대 위기를 맞게 됐다.
이쯤 되면 예상되는 수순이 있다.
검은 배경을 띄운 뒤 백지에는 사과문이 첨부돼 있다.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실망시킨 점 죄송합니다. 내부 조사를 진행 중이며…….”
하지만 이 기업은 시간을 끌며 대중의 관심이 잊혀지길 바라는 뻔한 경로를 우회했다.
재빠르게 CEO의 사임 절차를 밟았고 일주일 만에 불륜 상대인 임원 역시 사직 처리를 했다. 이후 공동창업자이자 최고제품책임자(CPO)인 피트 디조이가 CEO를 대행하면서 내부 수습을 빠르게 시도했다. 지금껏 기업간거래(B2B) 기업의 속성상 일부 고객사에게만 알려져 있던 이 스타트업은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기네스 펠트로가 맡은 ‘임시 대변인’
애스트로노머는 또 다른 카드를 꺼냈다. 애스트로노머가 이번 일을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등 쏟아지는 질문에 대응할 이른바 ‘임시 대변인’으로 할리우드 배우 기네스 펠트로를 선임한 것이다. 애스트로노머가 소셜미디어 계정을 통해 공개한 영상 속 펠트로는 당당하고 재치 있었다.
첫 질문은 이렇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요.” 원문에는 f로 시작되는 단어가 생략돼 있다. 그녀는 마치 영화 ‘트루먼 쇼’에서 트루먼(배우 짐 캐리) 이 진실을 묻자 이를 회피하면서 광고를 하는 아내 메릴(배우 로나 리니)처럼 천연덕스럽게 동문서답을 한다.
“애스트로노머는 아파치 에어플로우를 운영하기에 가장 좋은 플랫폼입니다.”
이어 대중이 궁금해하는 두 번째 질문이 나온다. “도대체 소셜미디어 팀은 (이 논란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요.” 이 역시 아주 자연스럽게 광고로 대체된다. 애스트로노머가 오는 9월 준비하는 행사에 대한 설명이다. 마지막에 펠트로는 “이제 우리가 가장 잘 하는 일로 돌아갑니다. 고객에게 게임 체인저급의 결과를 제공하는 일 말이죠.”
사건 자체에 대한 사과나 전후 설명을 언급하지 않지만 유머를 발휘해 오히려 회사가 이 논란과 상관없이 여전히 ‘본업’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임시 대변인으로 선임된 기네스 펠트로의 대중적인 이미지다. 평소 그는 신뢰도 높은 배우의 이미지는 아니다. 대중의 눈높이와 관계 없이 필터링 없는 솔직한 발언으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일이 몇 번 있다. 게다가 문제가 된 콜드플레이의 크리스 마틴의 전부인이라는 서사도 있다. 고맥락이 담긴 인물을 과감히 선택한 것이다.
사이드 스텝 밟기 전 조직 쇄신 있었다
물론 여기서 유념해야 할 부분이 있다. 애스트로노머가 문제가 된 인력을 내보내지 않고 조직을 쇄신하지 않은 채 유머라는 사이드 스텝으로만 대응했다면 이는 최악의 참사가 됐을 것이라는 점이다. 보통 위기 상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사 결정 지연, 책임 회피, 외부 자문 의존 등 세 가지 요소가 이 회사에는 없었다. 빠르게 상황을 인정한 뒤 책임을 묻고 새로운 부대에 새 술을 담았다. 이는 300여명의 직원들에게도 상황을 리더십이 통제하고 있다는 신뢰의 신호로 작용했다.
애스트로노머의 전략은 ‘내러티브 리셋’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재난은 벌어졌고 빠르게 잊혀질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했고 대신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각인시킬 것인가의 문제인 ‘구도 잡기(프레이밍)’에서 주도권을 갖는 편을 택했다. 진지하되 영혼 없는 사과 대신 유쾌한 전환, 방어나 변명 대신 유머를 활용했다. 결국 대중의 눈높이를 맞춘 감도 높은 커뮤니케이션의 승리였다. 언론도 애스트로노머의 대응을 두고 위기를 마케팅 기회로 바꾼 유일한 스타트업이라고 평가했고 펠트로의 영상은 링크드인, 틱톡, 엑스(옛 트위터) 등에서 수천만회 이상 공유됐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위기 대응의 교훈이 있다.
첫째, 속도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
침묵은 금이 아니다. 침묵하는 사이에 빈 이야기 공간은 타인이 만든 이야기가 채워진다. 이를 흘려두는 것은 책임 있는 리더십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둘째, 대중과의 문화적 소통 감각은 법적 효력보다 강하다
법적으로 문제 없는 보도자료나 사과문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역효과를 부른다.
셋째, 구도의 전환 만큼 중요한 방향 전환은 없다
잘못을 작게 보이는 것보다 이 잘못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고 그 방향을 바꿔 결국 판을 바꾸는 것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핵심이다. ‘어떻게 기억하게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위기 대응으로 조직의 가치를 증명하다
많은 조직이 위기를 겪는다. 2017년 오버 부킹된 승객들을 강제로 끌어내리는 영상이 소셜미디어를 뜨겁게 달궈 위기를 맞았던 유나이티드 항공은 이후 ‘밉상 항공’이 됐다. 진정성 어린 사과 대신에 법무팀이 쓴 사과문으로 책임을 피해가는 데 더 신경을 쏟았기 때문이다. 반면 팬데믹 당시 많은 이들을 해고해야 했던 공유 숙박 플랫폼 에어비앤비의 경우 대량 해고의 사정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해고된 직원들에게 폭넓은 지원 정책을 펼치면서 퇴사자들까지 충성도 높은 팬으로 만드는 기회를 만들고 다시 재기의 발판을 모색할 수 있었다.
애스트로노머 역시 그렇다. 정치적 언어로 위기를 가리거나 기술적 용어로 변명을 할 수도 있었으나 새로운 언어를 제시하고 동시에 스스로 증명했다.
“우리는 이 위기를 유쾌하게 마주보고 대처할 수 있는 성숙한 조직인가”
그 대답이 애스트로노머를 수 많은 데이터 기업 중에 빛나게 했고 이번 위기 대응 이후 13억 달러(약 1조8000억원)의 기업 가치는 더욱 빠르게 올라갈 것으로 보인다. 위기를 기회로 바꿔 새로운 반열에 올라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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