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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터리]선제적 채무조정제 도입해야

안용섭 서민금융연구원장

안용섭 서민금융연구원장




지금 우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당시보다 어려운 경제 격랑의 한가운데에 서 있다. 고금리·고물가·고환율의 삼중고에 수출 부진과 내수 침체까지 겹치면서 그 파고는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정조준하고 있다. 최근 자영업자 가구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은 34.9%에 달하고, 취약 자영업자의 1분기 연체율은 12.24%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부가 꺼내 든 카드 중 하나는 ‘장기 연체 채권 채무 조정 프로그램’이다. 단순한 부채 감면을 넘어 재기의 문을 여는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대상은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 원 이하의 무담보 채무자 113만 명이다. 상환 능력이 없으면 채무를 소각하고 현저히 부족한 경우 기존보다 폭넓은 감면 혜택을 제공한다. 국가가 정상적 경제활동에서 배제돼온 이들에게 재도약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취지다.

기존의 채무 조정이 ‘변제’ 중심이었다면 이번 조치는 ‘회복’ 중심으로의 전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단절의 낙인이 아니라 회복의 서사를 새로 쓰려는 시도다. 다산 정약용이 “어려운 백성을 먼저 살피는 것이 통치의 근본”이라 했듯 이번 정책은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물음을 되새기게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현실의 벽에 가로막히면 공허한 선언에 그치게 마련이다. 실태 조사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제도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고 복잡한 절차와 디지털 장벽에 가로막혀 신청을 포기한다. 특히 신용 평점 하위 10%는 제도권 금융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불법 사금융으로 내몰리고 있다. 고령층·장애인·저학력자 등 디지털 취약 계층에는 모바일 기반의 신청 시스템이 오히려 또 다른 장벽이 된다. 설명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배제되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취약성과 불균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업, 질병, 가정 해체 등 다중 위기를 겪는 이들에게 단일 금융정책은 역부족이다. 채무 감면 이후에도 생계 회복과 자산 형성을 위한 기반이 부실한 탓에 이들은 다시 연체의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누구나 삶의 한순간에 위기에 처할 수 있는 만큼 이는 사회 안전망의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

이제는 정책의 철학이 제도의 구조로 전환돼야 한다. 첫째, 연체자를 사전에 탐지하고 자동 지원하는 시스템이 시급하다. 건강보험·공공요금 체납, 복지 수급 정보 등을 활용해 위험군을 선제적으로 식별하고 ‘찾아가는 복지’를 실현해야 한다. 둘째, 정책 홍보의 언어 장벽을 낮추고 TV·라디오·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고령층과 디지털 취약층에도 다가가야 한다.

셋째, 감면 이후 회복을 뒷받침하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금융 교육, 직업훈련, 자산 형성, 공공 일자리 연계, 신용 회복 인센티브 등 다양한 지원이 패키지로 제공돼야 한다. 성실 상환자에게는 연체 기록 삭제와 금융 우대 같은 실질적 인센티브를 제도화하고 시민사회와 연계한 ‘채무 소각 파트너십 모델’도 적극 도입할 필요가 있다. 넷째, 정책 성과는 수혜자 삶의 변화, 제도 재이용률, 사회적 비용 절감 등 질적인 지표로 평가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전환의 순간이다. 채무의 굴레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삶이 다시 사회 일원으로 서는 일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준다. 경제가 타이밍이라면 우리는 지금 행동해야 한다. ‘부채의 종료’가 아닌 ‘회복의 시작’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야말로 이재명 정부가 대한민국에 남길 수 있는 가장 값진 유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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