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민간 자본을 활용해 기업 구조조정을 돕는 기업구조혁신펀드의 규모를 2배가량 늘린다. 석유화학과 철강 등 글로벌 공급과잉과 미국의 관세정책에 직격탄을 맞은 주요 산업 재편에 속도를 내려는 의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20일 금융계에 따르면 정부는 기업구조혁신펀드 6호의 투자금을 기존 5000억 원에서 최대 1조 원으로 증액하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구체적으로 한국산업은행·한국수출입은행·IBK기업은행 등 정책금융기관의 출자금을 2000억 원에서 4000억~4500억 원 수준으로 인상하는 방안을 검토한다. 정부 예산을 더해 최대 5000억 원을 공공 분야에서 대면 1대1로 민간에서 5000억 원가량을 출자해 약 1조 원 규모로 키우는 것이다. 정부는 올 하반기 중 최종 조성 규모를 확정할 방침이다.
정부는 지난달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추가경정예산에 철강·석유화학·2차전지·반도체·디스플레이 등 미국의 관세정책으로 피해가 예상되는 업종의 구조조정을 지원할 기업구조혁신펀드 6호를 신설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1조 원 이상으로 조성된 옛 기업구조혁신펀드와 달리 규모가 작아 제 역할을 하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정부는 2018년부터 총 5개의 기업구조혁신펀드를 조성한 바 있다. 금융계의 한 관계자는 “석유화학과 철강 등 주요 제조업의 상황을 고려하면 6호 펀드의 규모가 5000억 원에 불과해 금액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말들이 있었다”며 “펀드 규모를 2배가량 키우면 석유화학 등 구조조정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석화·철강·반도체…美 관세 취약업종 전방위 지원
정부가 기업구조혁신펀드 6호 조성액을 2배가량 확대하는 안을 검토하는 것은 석유화학·철강·디스플레이처럼 산업·통상 환경 변화에 취약한 업종들의 구조조정 지원에 속도를 내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정부·정책금융기관 측 재원을 마중물로 구조조정 대상 기업에 투자하는 민간 자금을 유치하는 것이 기업구조혁신펀드의 주요 취지다.
20일 금융계에 따르면 정부 출자액 확정부터 기업구조혁신펀드 6호 조성 완료까지 9개월가량은 걸릴 것으로 추정된다. 위탁운용사(GP) 선정을 비롯한 관련 행정 절차를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는 정부 예산 투입을 늘리는 대신 각 정책금융기관의 이사회 결의를 거쳐 출자액을 확대하는 것이 신속한 구조조정에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 각 정책금융기관은 늦어도 올 3분기 중 추가 출자 여부를 확정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내부에서는 산업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기류가 강하다. 중국의 과잉생산으로 각 제조업 부문의 수익성이 급격히 떨어진데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정책이 겹치면서 관세 부담까지 커졌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석유화학 산업을 포함한 한계 산업의 구조 전환을 국가 차원에서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석유화학의 경우 지난달 수출액이 1년 전보다 20.8% 줄어든 32억 4000만 달러로 집계됐다. 올 1월부터 5개월째 전년 대비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에틸렌 가격에서 나프타 가격을 뺀 값)는 톤당 약 160달러 수준에 그쳐 2022년부터 손익분기점 수준인 250~300달러대를 계속 밑돌고 있다.
철강산업도 마찬가지다. 철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철강 제품 생산 규모는 조강 생산량 기준 총 6365만 톤 수준으로 전년보다 4.5%가량 감소했다.
시장에서는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부·민간의 산업 구조조정이 탄력을 받기 시작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는 3월 한국화학산업협회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의뢰해 작성한 석유화학 재편 용역 보고서를 제출받고 이를 토대로 구조조정 지원책을 검토하고 있다. 롯데케미칼과 HD현대케미칼이 충남 대산석유화학단지의 나프타분해설비(NCC) 통합을 추진하며 업계 내 자율 구조조정에도 시동이 걸렸다. 최근 주철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석유화학산업의 경쟁력 강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하며 여당 측 입법 움직임 역시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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