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이달 기준으로 연체가 발생한 채권만 배드뱅크를 통해 인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경기 침체에 하반기에도 연체 채권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인수 조건을 제한하지 않으면 배드뱅크에 기대 고의로 빚을 갚지 않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15일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조만간 연체에 빠질 수밖에 없는 채무자도 있을 수 있지만 이 문제는 배드뱅크로 해결할 것은 아니다”라면서 “배드뱅크는 이미 연체에 빠진 채무자를 돕는 데 활용할 것”이라고 전했다.
채무자의 상환 능력이 부족할수록 원금 감면 폭은 클 것으로 예상된다. 회수 가능성이 적은 채권일수록 배드뱅크가 금융사에 더 싼값을 주고 매입해올 수 있는 만큼 채무를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구체적으로 채무자의 소득이 적거나 연체 기한이 길고 나이가 많은 경우 감면 폭이 클 것으로 보인다.
이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한계 상황에 내몰린 서민과 자영업자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서민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제도권 금융에서 불법 사금융으로 이동한 저신용자가 약 2만 9000~6만 1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이들의 불법 사금융 이용액은 약 3800억~7900억 원으로 예상된다. 전년보다 불법 사금융으로 옮겨간 인원(5만 3000~9만 4000명)과 이들의 이용액(6800억~1조 2200억 원)은 줄었지만 여전히 수만 명이 대부업에서조차 대출을 거절당해 불법 사채로 내몰리고 있다. 특히 최근 몇 년간의 누적 인원을 고려하면 대출 탕감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기 둔화가 장기간 지속하면서 대출에 의존해 연명하는 이들도 많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예금 취급 기관의 도소매 및 숙박·음식점업 대출 잔액은 올 3월 말 현재 341조 7753억 원에 이른다. 도소매의 경우 올 들어 250조 원을 처음으로 돌파했고 숙박·음식점업도 90조 원을 넘어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다. 그만큼 소상공인의 경영난도 한계에 다다랐다는 얘기가 많다.
당국은 올 하반기 만기가 돌아오는 소상공인·자영업자 정책 대출은 기본적으로 은행권이 자체적으로 마련해둔 채무 조정 프로그램을 통해 대응할 계획이다. 코로나19 당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게 지원됐던 정책 대출 중 9월 말까지 만기를 연장한 금액은 3월 말 기준 약 47조 4000억 원이다. 팬데믹 이후에도 대출 상환이 어렵자 수차례 만기를 미뤄왔는데 가장 최근인 2022년 10월 3년 연장한 대출 만기 시한이 돌아오는 것이다. 다만 당국은 이 중 실제 연체가 되는 금액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개별 은행의 채무 조정을 통해 상당 부분 감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은행권 자체 채무 조정에 더해 고금리를 저금리로 바꿔주는 정책 대환대출 프로그램이 별도로 마련될 가능성도 거론된다. 금융 당국 관계자는 “폭넓은 채무 조정이 이뤄질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구조조정 방안까지 함께 추진하는 것이 진정한 대책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전직 정부 고위 관계자는 “현재 자영업 문제의 근원은 과밀화가 상당히 심하다는 것”이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구조조정 방안부터 최우선 순위에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최근 발표한 소상공인 실태 조사를 보면 2023년 소상공인의 평균 영업이익은 2500만 원으로 당해 연 최저임금(2413만 원)을 소폭 웃돌았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이 지난해 말 발간한 ‘빅데이터를 활용한 소상공인 경영 실태 분석’의 내용도 비슷하다. 중기연에 따르면 2018~2023년 업체 수 증가율이 높았던 상위 10개 업종 중 7개는 가맹점 증가 폭이 전체 시장 매출액 상승률보다 더 가팔랐다. 커피음료점은 가맹점 증가율(223.38%)이 시장 전체 매출 오름폭(203.52%)보다 20%포인트 가까이 높았다. 매출 성장세보다 업체 증가 폭이 더 크다는 것은 그만큼 과당경쟁이 심화됐다는 뜻이다. 박창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중장기적으로 지역신용보증과 같은 정책 보증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중소기업 정책 전문가는 “희망리턴패키지 같은 재기 지원 강화 정책을 고도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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