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세가 지속 둔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이 관세 인상 전 확보한 재고를 판매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관세 정책의 여파가 아직 반영되지 않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관세의 지연효과가 올 여름 께 가시화할 것이란 전망이 유지되면서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연내 기준금리를 2차례 내릴 것이란 시장의 전망도 유지됐다.
미국 노동부는 5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4% 상승했다고 11일(현지 시간) 밝혔다. 전월 상승률(2.3%)보다 오름폭이 커졌지만, 시장 전망치(2.4%)에 부합했다. 전월 대비 상승률은 0.1% 올랐다. 각각 0.2%였던 전월 상승률과 시장 전망치를 밑돌았다. 블룸버그가 전망치 중간값을 산출하기 위해 접촉한 73명의 이코노미스트들 가운데 0.1% 상승을 전망한 이들이 한 명도 없을 정도로 5월 인플레이션은 예상 밖의 둔화세를 보였다.
변동성이 큰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CPI는 지난해 대비 2.8% 상승해 전월 상승률과 같았으며 시장의 전망치(2.9%)를 하회했다. 전월 대비 근원CPI 상승률은 0.1%로 직전월 0.2%보다 오름폭이 감소했으며 시장 전망치(0.2%)보다 낮았다.
에너지 가격이 전월보다 1.0% 하락하면서 전체 물가 상승세를 눌렀다. 특히 휘발유는 전월 대비 2.6% 떨어졌다. 다만 전기료가 전월 0.8% 오른데 이어 5월에도 0.9% 올랐다. 식품과 에너지를 제외한 근원 상품 물가는 0.0%로 보합세를 보였다. 특히 관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을 것으로 전망한 의류 가격이 0.4% 하락했으며 신차도 0.3%, 중고차 가격도 0.5% 하락했다.
근원 서비스 물가는 전월 대비 0.2% 상승률을 보였다. 전체 CPI의 35%를 차지하는 주거비는 0.3% 올랐다. 근원 물가에서 주거비까지 제외한 이른바 ‘슈퍼코어(super-cpre)’ 서비스 물가는 0.06% 오르는 데 그쳤다. 사실상 주거비와 에너지, 식품을 제외하면 서비스 물가도 인플레이션이 없었다고 볼 수 있는 수준이다. 슈퍼코어 서비스 CPI는 2022년 인플레이션이 한창일 당시 월간 상승률이 0.96% 까지 치솟기도 했다.
블룸버그이코노믹스의 애나 웡 이코노미스트는 “헤드라인(전체) CPI는 물론 근원 CPI가 매우 낮게 나온 것은 관세 정책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상을 거스르는 결과”라면서도 “기업들이 관세를 소비자에게 아예 전가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레저 서비스 항목이나 자동차 같은 내구재(3년 이상 사용 상품)의 가격 하락이 관세 전가 효과를 상쇄했다”고 분석했다. 내구재나 레저서비스는 소비자들이 미래 소득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고 소비를 조정한다는 신호로 볼 수 있기 때문에 5월 CPI를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평가다.
월가 대부분은 기업들이 관세 시행 이전 비축한 재고를 판매하거나, 7월까지 유예한 상호관세의 만료일까지 가격 인상 요인을 자체 흡수하고 있기 떄문이라고 봤다. 골드만삭스 자산운용의 멀티에셋 솔루션부문 공동최고투자책임자(CIO)인 알렉산드라 윌슨 엘리존도는 “기업들이 기존 재고를 활용하거나 수요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가격을 천천히 조정하고 있기 때문에 관세가 즉각적인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는 것”이라며 “앞으로 일부 상품 가격은 오를 수 있겠지만 서비스 가격은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앞서 각종 연구들은 2018년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세탁기 관세를 올린 지 2~3달 이후 가격에 반영되기 시작했으며 약 1년이 지난 후 관세 효과가 모두 반영됐다고 분석했다. 이를 고려하면 5월 CPI를 바탕으로 이번 행정부의 관세 정책의 물가 영향이 미미하다고 판단하기는 섣부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프린시펄 자산운용의 글로벌 수석 전략가인 시마 샤는 “관세로 인한 가격 상승이 CPI 데이터에 반영되기까지 몇 달이 더 걸릴 수 있기 때문에, 가격 충격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짓기엔 너무 이르다”며 “관세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려면 아마 늦여름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봤다.
이에 물가 상승과 이에 따른 경제 부담 가능성은 여전하다는 전망도 계속됐다. 임플로이아메리카의 디렉터인 스칸다 아마르나스는 “상품 물가나 주거비 상승 둔화 등 이번 CPI에서 고무적인 부분은 지난해 달성한 연착륙의 결과”라며 “올 여름이면 상품 물가와 전기 요금 인플레이션이 상당시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고, 이는 금리를 더 오래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요인이며, 그 결과 경기 침체 위험을 높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에 금리 선물 시장에서 연내 기준금리를 2회 인하할 것이란 기존 전망은 CPI 발표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툴에 따르면 연내 2회 인하 확률은 전날 39.8%에서 이날 40.7%로 1% 미만 상승했다. 동결이나 1회 내릴 확률은 같은 기간 38.6%에서 33.6%로 5%포인트 낮아졌으며, 3회 이상 인하될 확률은 21.7%에서 25.7%로 4%포인트 높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5월 CPI가 둔화하자 자신의 트루스소셜에 “훌륭한 수치”라며 “연준은 (기준금리를) 1% 포인트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연준이 기준 금리를 1% 포인트 내리면 미국은 만기가 도래하는 국채에 대해 훨씬 낮은 이자를 지불하게 되며,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트럼프 대통령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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