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005380)그룹이 미국 시장에서 인기가 높은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시장을 석권해 도널드 트럼프 정부의 관세 파고를 넘는 한편 북미 점유율을 확대해 가는 전략을 펼친다. 지난달 대형 전기 SUV인 아이오닉9을 현지에 처음 출시한 현대차그룹은 관세 부과에도 먼저 선보인 EV9에 대한 대대적인 할인 마케팅에 돌입했다. 현대차그룹은 하반기 대형 SUV인 팰리세이드 풀체인지 모델과 하이브리드를 추가한 텔루라이드 풀체인지 모델도 잇따라 공개한다.
2일 업계에 따르면 기아(000270)는 최근 미국 시장에서 2026년형 EV9 가격 인하에 들어갔다. 기아의 2026년형 EV9 가격은 엔트리 모델인 라이트 스탠더드레인지가 5만 4900달러(약 7500만 원), 최고급형인 GT-라인은 7만 1900달러(약 9900만 원)에서 출발한다. 기아는 2026년 모델을 출시와 동시에 라이트 롱레인지와 GT-라인 모델을 각각 2000달러(약 275만 원), 랜드 트림은 1000달러(약 138만 원)씩 가격을 인하했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정부가 전기차 보조금 폐지를 밀어붙이기로 하면서 시장 상황이 얼어붙자 현대차그룹이 판매량을 관리하면서 적극적 마케팅 전략을 펴는 것으로 해석한다. 기아의 EV9은 지난해 4분기까지 월 판매량이 2000대에 육박할 정도로 미국 시장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올 초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자 2월 판매량이 1360대로 하락했다. 이어 미국 의회에서 공화당이 전기차 보조금 폐지를 앞당기는 감세 법안을 구체화한 4월에는 판매량이 232대로 급격히 줄었다.
기아뿐 아니라 4월 미국 전체 전기차 판매량은 전월 대비 -5%를 기록하며 후진했고, 1위 업체인 테슬라는 판매가 13%나 감소하는 등 정책 불확실성에 따른 시장 충격이 큰 상황이다. 이에 현대차그룹이 2026년형 EV9 출시와 동시에 가격 할인을 단행하며 소비자 잡기에 나선 것이다.
현대차그룹이 기아 EV9의 판매량을 끌어올리는 배경에는 현지에서 본격화한 대형 SUV의 빅사이클을 완성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현대차는 지난달 미국 시장에서 처음 대형 전기 SUV인 아이오닉9 판매를 개시했고 이르면 3분기 중 대형 SUV인 팰리세이드 풀체인지 모델도 출시한다.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적용된 신형 팰리세이드는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으로 하이브리드차량(HEV)의 인기가 높은 미국에서 판매량을 끌어올릴 핵심 모델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기아의 베스트셀링카인 대형 SUV 텔루라이드 역시 하이브리드 모델을 추가해 하반기 미국 시장에 풀체인지 모델을 공개한다.
현대차그룹이 의욕적으로 미국에 선보이는 대형 SUV의 지향점은 궁극적으로 내년 상반기 출시될 제네시스의 대형 전기 SUV GV90으로 향하고 있다. GV90은 현대차그룹의 럭셔리 브랜드인 제네시스를 대표할 대형 SUV다. 현대차·기아의 대형 SUV들이 시장에서 확고히 자리 잡아야 상위 브랜드인 제네시스 GV90이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고 현대차그룹 전체 브랜드 가치도 높아진다.
현대차그룹이 EV9·아이오닉9, 팰리세이드·텔루라이드에 이어 GV90까지 대형 SUV 풀라인업을 완성하기 위해 최전선에 있는 EV9의 파격적인 할인에 나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 시장에서 관세 리스크가 크지만 판매가가 높은 대형 SUV들이 많이 팔리면 수익성도 함께 개선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현대차와 기아는 내수 부진으로 지난달 판매량이 국내에서는 감소했지만 해외 판매는 선전했다. 현대차의 5월 전체 판매는 지난해 동월보다 1.7% 줄어든 35만 1174대를 기록했는데 내수 판매(-5.2%)가 줄어든 영향이 컸다. 기아 역시 5월 내수 판매(-2.4%)는 줄었으나 해외 판매가 2.6% 늘면서 전체 판매대수도 26만 9148대로 1년 전보다 1.7%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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