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발표 이후 처음으로 미국이 영국과 큰 틀의 무역 합의에 도달하면서 이번 협상 결과는 앞으로 세계 각국에 협상 선례가 될 전망이다. 이번 합의를 통해 미국이 어떤 관세를 어느 정도 선까지 양보할 수 있는 지 확인하면서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8일(현지 시간) CNBC 인터뷰에서 미국과 영국이 이날 무역 협상 합의를 발표한 것과 관련 “이것은 바로 우리가 맺어야 할 협상의 유형”이라며 “다른 국가들이 이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협상에서는 미국이 자동차 관세 등 품목별 관세를 국가 별로 면제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양측 발표에 따르면 미국은 영국산 철강과 알루미늄에 대해 무관세를 적용하기로 했으며, 자동차 관세 역시 영국산 자동차에 대해서는 10만 대에 한 해 10%로 인하하기로 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철강·알루미늄(3월 12일 발효), 자동차(지난달 3일 발효) 등 품목별 관세를 각각 25% 씩 매긴 바 있다.
세계 각국은 지금까지 품목별 관세가 면제될 수 있는 지 주목했다. 이와 관련 앞서 미국 측은 지난 1일 워싱턴DC에서 열린 일본과의 2차 관세 협상에서 25%의 철강·알루미늄 관세와 25%의 자동차 관세는 협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을 전달하면서 선을 그은 바 있다. 다만 이번 협상을 통해 미국은 품목별 관세가 인하를 넘어 면제까지 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하게 됐다.
이는 자동차가 주력 수출 품목인 우리 나라는 긍적적인 신호로 풀이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대미 자동차 수출액은 347억 달러로 전체 미국 수추의 27.1%를 차지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3월 24일 백악관에서 4년 간 210억 달러 가량을 미국에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발표한 기업 대표 초청 행사에서 자리에 있던 최고경영자들(CEO) 중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을 가장 먼저 거명하며 “땡큐”라고 인사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해당 투자의 하나로 진행되는 루이지애나주의 제철소 건설로 많은 일자리가 창출된다며 “호세, 땡큐, 뷰티풀(beautiful)”이라고 재차 언급했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추후 반도체 관세 역시 부과하겠다는 입장인 만큼 품목별 관세에 대한 면제는 한미 관세 협상의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한미 무역 협상에서 이번 영국의 협상 결과와 같이 주요 품목별 관세를 면제 받거나 인하할 수 있다면 관세에 따른 무역 수지 악화를 방어하는 데 가시적인 성과가 될 전망이다.
이와 달리 미국은 이번 영국과의 협상 결과를 통해 상호관세 가운데 10%의 기준(base line) 관세는 면제 대상이 아니라는 기존 입장이 사실이란 점을 확인했다. 영국은 이번 합의에서 10%의 기준 상호 관세는 면제 받지 못했다. 앞서 지난달 2일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에 상호관세를 발표하면서 영국은 10%를 부과했다. 이는 미국 측이 ‘기본 관세’라 표현하며 주장하는 최저 상호관세율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2일 발표한 상호관세는 모든 나라에 일률적으로 적용하는 10%와 나라별 추가분으로 구성된다. 일본 24%, 한국 25%, 중국 34%, 베트남 46% 등 각국에 대한 관세율이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9일 오는 7월 8일까지 각 국별 상호관세 중 추가분은 유예하고 일률적으로 10%를 부과하고 있다. 앞서 미국은 일본과의 협상 과정에서도 24%의 대(對) 일본 상호관세 가운데 모든 나라에 적용하는 10%는 재검토 대상이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상호관세 중 일본에 대한 추가분 14%만 조정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날 영국과의 협상 결과를 설명하면서 “10%이라는 기준은 아마도 가장 낮은 수준일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날 영국의 협상 결과가 앞으로 나올 여러 협상 결과 중 가장 유리한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영국은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과 관세를 둘러싸고 각을 세우지 않았고 무엇보다 미국은 영국과의 무역에서 흑자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해 영국과의 상품 교역에서 119억달러 흑자를 기록했다. ING의 수석 국제 경제학자인 제임스 나이틀리는 “영국은 중립적인 무역 입장을 취하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라는 매우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이 따를 수 있는 틀이 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영국 외에 이른 시일 내 협상 결과가 발표될 수 있는 국가로는 인도와 일본이 꼽힌다. 일본은 현재 자동차 관세와 상호 관세를 포함한 “모든 관세를 재검토해달라”는 입장으로 전해졌다. 유럽연합(EU)은 대미 관세 협상 불발에 대비해 최대 950억 유로(약 150조원) 상당의 미국산 상품에 대한 보복 준비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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