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경제 컨트롤타워인 최상목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사퇴하면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정부의 공식 조직은 아니지만 최근 최고 리스크 관리 기구로 떠오른 ‘거시경제·금융현안간담회(F4 회의)’에서 이 총재가 사실상 좌장 역할을 할 것으로 관측되면서다. 이 총재는 그동안 비상계엄 등 중대 국면마다 시장 안정을 위한 메시지를 내놓으며 ‘리스크 파이터’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도 했다. 통상·환율 등 경제 이슈가 산적한 가운데 이전 한은 총재와 다른 적극적인 발언과 행보를 바탕으로 경제 수장의 공백을 메우는 조력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 총재의 위기 수습이 가장 돋보였던 것은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때였다. 당시 최 전 경제부총리가 윤석열 전 대통령의 계엄 결정에 반대하고 사의를 표했을 때 강력하게 만류했던 게 바로 이 총재였다. 당시 이 총재는 “경제부총리가 경제 사령탑인데 부총리가 있어야 대외적으로 심리가 안정되고 경제 상황 수습이 가능하다”며 최 부총리를 돌려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관세 리스크로 우리나라 성장률 전망이 곤두박질 치는 상황에서 “그것이 우리의 실력”이라며 경제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는 메세지를 역설한 것도 이 총재였다. 그는 올 2월 한은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기자회견에서 “내년도 성장률 전망치 1.8%가 우리의 실력이며 구조조정 없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해 경제계에 경고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구조적 문제인 교육·노동·인구 등 주요 의제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본인의 소신을 표명하고 있다. 지난해 9월에는 “대학이 성적순으로 학생을 뽑는 게 가장 공정한 것은 아니다”라며 입시제도 개선의 필요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금융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앙은행 총재가 사회 현안에 대해 언급하는 게 적절하냐는 비판이 있었지만 사회적 이슈에 대해 꾸준히 의견을 밝히면서 신뢰를 얻고 있다”며 “계엄·탄핵 정국에서도 정돈된 메세지를 발표하고 거시금융 리스크를 관리하는 모습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이달 4~7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아시아개발은행(ADB)연차총회, 한중일 및 ‘아세안+3’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대미 관세 협상에서 환율이 의제로 올라온 가운데 고위급 참석이 어려워진 기재부 대신 이 총재가 물밑에서 주요국 당국자와 대응 방안을 논의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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