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죽음은 모순적이게도 좋은 삶과 직결돼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 누구나 한 번쯤 죽음을 고민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최근 에세이집 ‘법의학자 유성호의 유언 노트’를 펴낸 유성호 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는 28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00세 시대가 찾아오면서 삶이 건강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필연적인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유언을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삶 역시 마지막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출간 배경을 밝혔다.
‘후회 없는 삶을 위한 지침서’라는 부제가 붙은 책은 부검을 통해 매일 죽음을 마주하는 법의학자가 깨달은 삶의 마지막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를 설명한다. 그는 책에서 유언을 통해 죽음과 삶을 직면할 것을 권하고 있다. 죽음을 단순히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아닌 필연적 존재로 받아들였을 때 앞으로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부검을 통해 수많은 사연을 접하면서 누구나 죽음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며 “유언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살아갈 날들을 계획하는 방법”이라고 전했다.
유언이라고 해서 우울한 내용만 담기는 건 아니다. 가치관부터 소중한 추억, 가족에게 남기고 싶은 말,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등 사소한 것들까지 자유롭게 기록하는 방식이다. 30대 후반부터 유언을 쓰기 시작했다는 유 교수는 “매년 연말이면 유언을 쓰는데 그때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정리하면서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삶을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다”면서 “그런 차원에서 유언은 삶을 향한 다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유언장을 일종의 비망록이나 에세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면서 “결말을 구상하면서 소설을 써 내려가듯이 유언을 통해서 내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정리하다 보면 앞으로의 인생을 더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 교수는 책을 통해 자신의 유언도 공개했다. 그의 유언장에는 ‘가능한 한 오래 아내와 함께 우리 집에 머물고 싶지만 시설의 돌봄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죄책감이나 망설임 없이 시설을 선택해 주세요. 제 존엄을 지켜주신다면 그것이 저를 위한 최고의 배려일 것입니다.’ ‘제가 돌이킬 수 없는 말기의 상태라면 모든 연명 치료를 중단해 주십시오. 다만 통증 없이 갈 수 있도록 진통제를 충분히 투여해 주세요.’ ‘장례식에서는 루이 암스트롱의 ‘왓 어 원더풀 월드’를 틀어 주세요’ 등의 내용이 담겼다.
유언을 언제부터 써야 하는지를 묻는 말에 유 교수는 50세 전후가 가장 좋은 시점이라고 했다. 삶을 중간 점검하는 도구라는 차원에서 절반의 인생을 산 시점에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앞으로 남은 삶이 선명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유언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만을 위한 게 아니다”라며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살아갈 날들을 계획하는 방법,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하는 방법, 인생의 의미와 목표를 발견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유언도 나이가 들면서 바뀌는 생각을 계속 업데이트해나가는 게 중요하다”며 20대도 최근 불고 있는 필사 열풍을 계기로 남의 글이 베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써볼 것을 권했다.
‘유언 노트’는 연명 치료 중단, 존엄사, 안락사 등 논쟁적인 주제도 함께 다루고 있다. 각국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독자들의 의견을 묻고 있다. 그는 “100만 명에 달하는 베이비붐 세대가 노년기에 진입하면서 존엄사 등 국내 도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면서도 “서구와 한국인의 생사관이 다르고, 가족이라는 개념도 넓기 때문에 적확하게 역사적 맥락을 이해한 다음에 받아들일지를 결정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27년간 3000건이 넘는 부검을 하며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우는 법의학자의 길을 걸어온 유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삶의 소중함을 거듭 강조했다. “제 유언은 ‘이 아름다운 지구에서 죽음 앞에서도 빛나는 나의 소중한 삶을 위하여’라는 글귀로 시작합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한 우주의 소멸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삶이 소중하다는 의미죠. 요즘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많은 분들이 유언 노트를 통해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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