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의 아버지’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 미사가 26일(현지 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엄수됐다. 세계 각국 정상 및 왕실 인사, 일반인 조문객 수만 명이 참석해 소박한 목관에 누운 교황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특히 이번 미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 등 주요 인사들이 모이고 중국어 기도문이 낭독되는 등 전 세계가 함께 애도했다.
이날 미사는 오전 10시(한국 시각 오후 5시)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목관이 성 베드로 성전에서 야외 제단으로 운구되면서 시작됐다. 집전을 맡은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은 강론에서 교황이 생전에 강조했던 “벽이 아니라 다리를 세우라”는 말을 꺼냈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트럼프 대통령의 국경 장벽 공약을 겨냥해 교황이 내놓은 메시지였다. 과거 이민정책과 기후변화 대응 문제로 교황과 자주 충돌했던 트럼프 대통령은 미사 전 멜라니아 여사와 함께 잠시 묵념했다.
교황의 관 안에는 고위 성직자의 책임을 상징하는 팔리움, 재위 중 발행한 동전과 메달, 주요 업적을 담은 문서가 함께 봉인됐다. 검소한 생활을 추구했던 교황의 뜻에 따라 삼중관 대신 아연으로 내부를 보강한 단일 목관만 사용됐다.
교황청에 따르면 조문객은 약 25만 명으로, 베네딕토 16세 은퇴 교황 장례 당시보다 5배나 많았다. 운구 행렬에는 15만 명이 운집하며 최소 40만 명이 교황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것으로 추산됐다.
이날 미사에서는 처음으로 중국어 기도문도 낭독됐다. 생전 중국과의 관계 회복에 힘썼던 교황의 유지를 기리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1951년 대만을 정부로 인정한 바티칸과 단교한 후 공식 외교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중국은 공식 대표단을 보내지 않았지만 교황 선종 다음 날 애도의 뜻을 전했다.
장례를 마친 교황의 관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으로 옮겨졌다. 교황의 시신이 바티칸 밖에 안치되는 것은 1903년 레오 13세 이후 122년 만이다. 교황의 뜻에 따라 무덤은 외증조부의 고향인 리구리아산 대리석으로 제작됐고 묘비에는 장식 없이 ‘프란치스투스’라는 이름만 새겨졌다.
각국 정상들이 모인 장례식은 또 하나의 비공식 대규모 외교 무대가 됐다. 특히 당초 집권 2기 첫 해외 순방지로 5월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을 예정이었던 트럼프 대통령은 교황 선종으로 계획을 변경해 유럽을 먼저 방문하게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사 직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요르단강 세례 장면을 배경으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극적으로 회동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과 짧은 대화를 나눈 직후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겨냥한 강경 메시지를 올렸다. 그는 '푸틴은 민간 지역과 도시에 미사일을 쏠 이유가 없었다"며 “전쟁을 중단할 의사가 없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어 “은행 제재나 2차 제재를 검토해야 한다”며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있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을 이처럼 직접 비판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 중재를 자처한 후 처음이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회담 후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과 무조건적 휴전 문제를 논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장례 미사 직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도 별도로 회담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날 트럼프와 젤렌스키가 요르단강 세례 장면이 담긴 모자이크를 배경으로 단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두고 ‘극적인 장면’이라고 묘사했다.
생전에 평화를 호소하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와 더불어 이 자리에 함께 참석한 유럽 정상들과의 만남도 트럼프의 입장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장례식 참석 전후로 그는 마크롱 대통령,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등과 짧게 만나고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는 취임 이후 처음으로 악수를 나누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경고 메시지를 시작으로 향후 종전 협상 기조가 바뀔지 이목이 쏠리는 가운데 푸틴 대통령은 공세 수위를 낮추지 않고 있다. 크렘린궁은 푸틴 대통령이 이날 발레리 게라시모프 러시아 참모총장으로부터 우크라이나군에 점령됐던 쿠르스크주를 완전히 탈환했다고 보고받았다며 북한의 군사 지원을 처음으로 인정했다. 이에 우크라이나는 자국군이 쿠르스크주에서 여전히 전투하고 있다며 이를 부인했다.
한편 이날 장례식에는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시우바 브라질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 등도 참석했다.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 대신 올가 류비모바 문화장관을 대표로 파견했다. 이란·이스라엘·팔레스타인자치정부 역시 각각 대표를 보냈다.
한국에서는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끄는 민관 합동 조문 사절단이 참석했으며 오현주 주교황청 대사, 안재홍 천주교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장이 동행했다. 염수정 추기경, 이용훈 주교, 임민균 신부 등 한국 천주교 조문단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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