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정부세종청사 중앙동. 오전 11시 20분을 갓 넘기자 공무원 수십 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해 인근 식당으로 향했다. 일부 공무원은 청사 인근 상가에서 여유 있게 점심을 즐긴 후 오후 1시 20분이 다 돼서야 청사로 복귀하기도 했다. 세종청사에 근무하는 한 과장급 공무원은 “요즘에는 스마트폰으로 ‘외출’을 신고하면 연차도 해소하고 점심도 느긋하게 먹을 수 있어 다들 활용하는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정치 리더십 공백 속에 ‘임시정부’ 상태가 길어지면서 관료 조직이 흔들리고 있다. 복무 규정의 가장 기본인 점심시간을 어기는 것은 예사이고 입법 예고 과정에서 표기 실수를 저지르는 등 나사 풀린 공무원들이 급증하고 있다.
관계부처에 따르면 기획재정부는 이날 관보에 19일 게재했던 ‘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 개정 법률안 입법 예고’에 대한 정정 공고를 냈다. 75년 만에 이뤄진 상속세 개편의 핵심인 유산취득세 관련 내용이다. 기재부는 당초 개정안에서 상속인이 피상속인의 직계비속 등인 경우에는 5억 원, 그 외의 경우 2억 원의 일괄공제를 적용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입법 예고 과정에서는 직계비속이 아닌 경우의 인적공제가 2억 원이 아닌 ‘1억 원’으로 잘못 기재된 사실을 뒤늦게 발견하고 이를 정정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관보 게시 후 오타 사항을 발견해 수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유사한 실수는 또 있었다. 기재부는 한·필리핀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미양허 품목에 대해 ‘미양허’가 아니라 기준관세율이 기재돼 있던 것을 확인하고 이날 정정 공고(FTA 이행을 위한 관세법의 특례에 관한 법률 시행령)를 냈다.
단순한 실수만 문제가 아니다. 최근 재계에서는 제대로 된 경제·산업 정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새로운 정책이 개발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가 약속한 정책들까지 표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재부가 연내 도입하기로 했던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의 1인 다규제 허용 방안은 아직 증권 업계와의 기초적인 논의조차 시작되지 못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주도로 지난해 말 발표된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도 속도를 못 내고 있다. 정부가 약속한 산업위기 선제 대응 지역 지정의 경우 다음 주 여수시를 대상으로 관계부처 합동 현장 실사가 진행된다. 최종 심사까지 고려하면 최소 두 달 이상 더 걸릴 것으로 보인다.
업계가 민간 컨설팅사에 맡긴 경쟁력 강화 방안은 다음 달 초 정부에 최종 결과가 통보될 예정이다. 최근 산업계에서 주요 화학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임박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업무 진행 속도가 느리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조기 대선이 열릴 가능성이 크다고 본 주요 부처들이 새로운 정책 아이디어를 뒤로 감추고 사실상 복지부동하고 있다”며 “정권 교체를 가정해 고위 공무원들은 승진을 꺼리고 세종에서 사는 사무관들은 서울 출장을 기피하는 사실상 행정 마비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리더십 공백이 장기화하다 보니 정부 장차관들도 부하 직원들에게 제대로 질책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에 따라 국무조정실이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례에 비춰 복무 기강 해이를 다잡고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위반행위를 엄단하는 국조실의 메시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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