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모쪼록 큰 사업가가 되시오"…'대한독립' 함께 외쳤던 민족기업인들

이육사와 교류 독립자금 댄 교보창업주

활명수 통해 독립자금 지원한 동화약품

유한양행 해외지사 항일 지하조직 거점으로

LG·GS·두산 창업주 독립자금 지원 등 활동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자. 사진제공=교보생명




올해 106주년 3·1절을 맞아 일제 강점기에 맞서 싸운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던 기업인들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던 광복의 한줄기 빛을 열기 위해 막대한 재산을 지원하며 인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민족기업들은 대한독립을 함께 외쳤다.

◇이육사를 스승으로…광복군 스무명 몫 해낸 교보생명 창업주=금융업계에서는 신용호 교보생명 창업주가 독립운동가들을 적극 지원한 대표 기업인으로 평가 받는다. 신 회장은 1937년 스무살이 되던해 중국으로 건너가 다렌, 베이징 등에서 쌀 장사를 하며 큰돈을 모았다고 한다. 당시 집안 어른이자 독립 사상가였던 신갑범 선생의 소개로 신 회장은 ‘광야’, ‘절정’, ‘청포도’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저항시인 이육사와 교류하며 국가와 민족 정신에 눈을 뜨게 됐다고 전해진다. 신 회장은 이육사 시인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알려져있다.

이육사 시인은 신 회장에 “모쪼록 큰 사업가가 되어 헐벗은 동포들을 구제하는 민족자본가가 되길 바라네”라며 격려했고 신 회장 역시 “반드시 큰 사업가가 되어 독립운동 자금을 내놓겠다”고 다짐했다. 신 회장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기회가 올 때마다 이육사 시인에 독립운동 자금을 건넸다. 이육사 시인은 신 회장에 “광복군 열 명, 스무 명의 몫을 혼자 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라며 큰 고마움을 표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교보생명에 따르면 신 회장이 1958년 교보생명(대한교육보험주식회사)을 창업한 것 역시 민족 정신이 바탕이 됐다고 설명했다. 광복과 6·25 사변을 거치며 피폐해진 조국 땅에 민교육진흥을 위해 인재육성에 대한 신념을 실천한 것이란 설명이다. 지금도 광화문 사거리 금싸라기 땅에 누구나 자유롭게 책을 볼 수 있는 대형 서점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도 창업자의 정신이 반영된 것이라고 교보 측은 설명했다.

◇'사람 살리는 물'로 임시정부 군자금 댄 동화약품=소화제 가스활명수(活命水)는 국내 최초 양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름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물’인데, 사람만 살린 게 아니라 우리 민족을 살리는 데 기여한 제품으로 불리기도 한다.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 민강 사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댄 인물이다. 임시정부와 국내독립운동가 사이의 연락은 ‘서울 연통부’가 담당했는데, 민 사장이 책임자로 활동했다. 여기에 더해 민 사장은 활명수를 팔아 얻은 이익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댔다. 당시 활명수 한 병은 50전으로,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20리터)을 먹을 수 있는 가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일제의 감시로 돈을 전달하기 어려우면 대신 활명수를 중국으로 보내 팔아 자금을 마련하게 했다.

동화약품의 활명수(왼쪽)와 까스활명수큐 모습


민강 사장은 임시정부에 발송할 비밀문서를 목판에 새기다 발각되는 등의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 때문에 건강이 악화해 1931년 48세의 나이로 독립을 보지 못하고 결국 사망했다.

동화약품은 대대로 독립운동가 사장이 나왔다. 5대 사장인 윤창식 선생은 민족 경제 자립을 목표로 하는 ‘조선산직장려계’, ‘신간회’ 등을 지원했다. 7대 사장인 윤광열 명예회장은 주호지대 광복군 5중대 중대장직을 맡기도 했다고 한다. 민강 사장에게는 지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서울 중구 서소문로 동화약품 본사에 설치된 ‘서울 연통부’ 기념비. 동화약품 본사는 일제 치하 국가의 독립을 위해 국내외를 연결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의 비밀 행정기관인 서울 연통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사진제공=동화약품




◇항일 조직 활동까지 한 유일한 박사=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는 독립운동가 후원 뿐 아니라 직접 항일조직과 특수공작대에서 활동했다. 어릴 적 미국에서 생활했던 유 박사는 1909년 미국에 설립된 한인소년병학교에 들어갔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서재필, 이승만과 함께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했다.

유일한 박사는 일제 식민치하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우리 민족의 현실을 보고 1926년 귀국해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설립하게 된다. 기술 인재를 양성해 민족의 역량을 높여 독립과 국가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지였다.

유한양행의 해외 지사는 독립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에 만들어져 유사시에는 항일운동의 지하조직 거점으로 운영됐다고 전해진다. 유 박사는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쳐갔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일제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전략정보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했다. 1945년엔 재미 한인을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교란하는 ‘냅코(NAPKO) 작전계획’에 참여했다.

소년병 시절 유일한 박사의 모습(앞줄 맨 오른쪽). / 사진제공=유한양행


1941년 유일한 박사는 미군 전략정보처 OSS(현 CIA 전신)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했다. 조국 광복에 대한 유일한 박사의 투철한 의지는 1945년 '냅코(NAPKO) 작전계획' 참여에서도 확인된다. OSS가 수립한 이 계획은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 한인을 선발, 특수공작훈련을 시킨 뒤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려는 작전이었다. 1945년 1월 이 작전 계획의 핵심 요원으로 선발된 유일한 박사는 제1조 조장으로 임명돼 훈련을 받고 명령을 기다리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 실행을 하지 못했다.

유 박사는 1971년 타계하면서 유한양행 소유주식을 공익법인인 유한재단에 남겼다. 유한양행 관계자는 “유일한 박사는 한국에서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했고, 기업 경영사에 남을 선진적인 일을 실천했다”.유 박사는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독립운동 자금 지원 했던 LG·GS=구인회 LG그룹 창업주와 허만정 GS그룹 창업주는 독립운동 자금을 댄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구 창업주는 진주에서 구인상회란 포목상을 운영했다고 한다. 1942년 백산 안희제 선생에 80kg 쌀 500가마니를 살 수 있는 1만 원을 건네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이 시작됐다고 한다.

허만정 GS그룹 창업주는 1914년 백산상회 설립에 참여했다. 백산상회는 만주와 상해에서 활동하는 독립군을 지원하기 위한 자금조달 본부로 ‘독립군의 은행’으로 불렸다. 허 창업주는 초기 주주 32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전해진다. 백산상회는 표면상으로는 곡물과 면직물,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가게였지만, 비밀리에 독립군과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 허만정 선생은 인재 양성을 위해 1925년 진주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진주여고의 전신)를 세우기도 했다.

구인회 LG창업회장이 운영하던 포목상점. / 사진제공=LG


◇국채보상운동 이끌었던 두산 창업주=박승직 두산그룹 창업주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등 민족 기업가로 활동했다. 국채보상운동은 일제로부터 도입한 차관으로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1907년 ‘일본에 진 빚을 갚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모금 운동이다. 1944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위해 청년 징용에 나서자 이들을 취업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구해내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

서경 마켓시그널

헬로홈즈

미미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