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공시 번복, 공시 불이행 등 불성실 공시 법인으로 지정 예고된 상장사 수가 대폭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경영 환경 악화 등으로 불가피하게 공시를 바꾸는 사례도 있지만 상습적으로 공시 규정을 어기는 기업도 대거 등장해 공시 시스템에 대한 시장 신뢰도가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 당국이 수년째 공시 부담을 줄이고 제재를 강화했지만 불성실 공시 법인이 지속 늘어나는 만큼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26일 한국거래소 기업공시채널(KIND)에 따르면 올해 1월 2일부터 2월 26일까지 불성실 공시 법인으로 지정 예고된 상장사 수는 35개사로 전년 동기(22개사) 대비 59% 급증했다. 불성실 공시 법인 지정이 147건으로 역대 최대였던 지난해보다 빠르게 늘어났다. 연초부터 공시 규정을 위반한 상장사 수가 늘어난 만큼 연간 지정 건수도 증가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불성실 공시 법인으로 지정된 상장사 수도 20개사에서 26개사로 늘었다.
한국거래소는 상장사가 자본시장법이나 공시 규정에 의한 공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을 때 지정을 예고한 뒤 이의 신청을 받아 불성실 공시 법인 지정 여부를 결정한다. 불성실 공시 법인은 고의·과실 정도와 위반 경중에 따라 벌점을 부과한다. 1년 이내 누적 벌점이 15점 이상이면 관리종목으로 지정되거나 상장적격성 실질 심사를 거쳐 퇴출 여부를 검토한다.
올해 들어 불성실 공시가 급증한 것은 경기 침체 장기화로 경영 환경이 악화되자 불가피하게 기존 공시를 번복하는 사례가 늘었기 때문이다. 유상증자를 공시했다가 경기 침체 등으로 목표했던 자금 조달이 어렵게 되거나 당초 체결했던 계약에서 물량이나 금액 등이 줄어들면서 공시를 바꾼 것이다.
소액주주 반발과 당국 제동으로 유상증자를 포기했다가 불성실 공시 법인으로 몰린 사례도 생겼다. 인쇄회로기판(PCB) 기업인 이수페타시스는 지난해 탄소나노튜브(CNT) 제조 업체인 제이오 인수를 추진하면서 55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추진했다가 올해 1월 계약 해지를 하면서 유증 규모도 2500억 원으로 줄였다. 소액주주연대의 인수 반대와 당국의 증권신고서 정정 요구 등으로 인수를 포기한 뒤 불성실 공시 법인으로 지정 예고됐다. 금양도 당국의 정정 요구 등으로 유증 철회 후 불성실 공시 법인 예고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해 11월 감독 당국이 집중 점검을 예고한 ‘단일판매·공급계약’ 관련 공시도 번복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코오롱생명과학은 2018년 체결했던 1727억 원 규모의 공급계약이 해지됐다고 지난해 말 공시하면서 벌점 5점을 받아 불성실 공시 법인이 됐다. 분체이송 시스템 전문기업인 디와이피엔에프는 계약 상대방이 자금난에 빠진 뒤 연락 두절되면서 계약을 해지했으나 불성실 공시 법인으로 지정되지는 않았다. 기업마다 각자 사정이 있겠지만 투자자 입장에서는 허위·과장 공시였는지 판단이 어렵다.
올해는 지정 예고된 코스피 상장사 수가 4곳에서 9곳으로 늘어나는 등 시장 전반에서 불성실 공시가 이뤄지는 것도 문제다. 풀무원은 종속회사의 회사 합병을 뒤늦게 공시했는데 이를 직원의 단순 실수로 설명하고 있다. STX도 네덜란드 업체인 계약 상대방을 국내 기업이라고 잘못 공시했다가 바꿨다.
상습적인 공시 번복 등으로 벌점이 쌓인 상장사도 대거 등장했다. 이날 기준으로 누적 벌점이 15점 이상인 상장사 수는 14개사로 엔케이맥스(39.4), 제넨바이오(38.4), 엠에프엠코리아(35.7), 셀피글로벌(27.5), 세원이앤씨(27) 등은 누적 벌점만 25점을 넘는다. 노블엠앤비는 불성실 공시 법인으로 지정되고도 제재금 3800만 원을 내지 않아 가중 벌점을 받는 등 공시 시스템 전반이 흔들리고 있지만 당국은 뾰족한 대책이 없다.
문제는 불성실 공시가 반복될수록 시장과 공시 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국이 이 같은 문제를 막기 위해 기업 공시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제재를 강화하는 조치를 지속적으로 추진해왔으나 오히려 불성실 공시가 늘어나는 추세다. 금융투자 업계 관계자는 “공시 위반 제재 조치에도 위반 건수가 늘어나는 원인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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