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주요 철강사들이 후판(두께 6㎜ 이상 강판) 가격 인상에 나선다. 정부가 중국산 저가 후판에 최대 38%의 잠정 관세를 매기기로 하자 선제적으로 가격을 높여 수익성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철강사들이 국내 후판 유통가를 올리기 시작하면서 난항을 겪어 온 조선업계와의 가격 협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가능성이 커졌다.
25일 철강 업계에 따르면 동국제강(460860)은 판매점 등 유통시장에 공급하는 후판 가격을 전날부터 톤당 3만 원씩 올리기로 했다. 후판 생산량 1·2위인 포스코와 현대제철(004020)은 내달 중 후판 가격을 인상하는 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동국제강과 비슷한 수준으로 가격을 인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위원회는 이달 20일 중국산 후판에 최대 38.02%의 잠정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잠정 관세는 기획재정부의 검토를 거쳐 한 달 내로 확정돼 부과된다. 하지만 철강업계는 국산 저가 후판에 반덤핑 잠정 관세가 실제로 부과되기 전 가격 인상 카드를 꺼냈다. 사업 수익이 장기간 악화하는 상황에서 한 달을 기다릴 만큼의 여유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국내 후판 시장은 2022년부터 중국이 내수 부진에 따른 후판 재고를 한국에 밀어내기 식으로 수출하면서 수익성이 크게 악화했다. 2021년 44만 6495톤이었던 중국산 후판 수입량은 지난해 138만 1476톤으로 3배 넘게 급증했다. 톤당 75만 원 수준인 저가 후판이 국내로 유입되기 시작하자 후판 유통가격은 2022년 4월 톤당 138만 원에서 이달 90만 원으로 35%가량 폭락했다.
후판의 원재료인 철광석 가격과 원달러 환율이 급등했다는 점도 국내 철강사들의 후판 가격 인상을 재촉했다. 전날 기준 철광석 수입 가격은 톤당 109달러로 지난해 9월(90달러)보다 20달러 가까이 상승했다. 같은 기간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330원에서 1430원까지 올랐다. 철강사들은 호주와 브라질 등에서 철광석을 수입할 때 미국 달러로 결제대금을 지불하는데 5개월 만에 원가 부담이 30%가량 상승한 것이다.
조선·건설 등 산업에 전방위적으로 사용되는 후판은 국내 시장 규모가 8조 원에 이르는 핵심 철강재다. 포스코의 1~3분기 철강재 생산량 3159만 톤 중 15.3%(485만 톤)가 후판 제품이다. 하지만 지난해 건설업 등 전방 수요가 부진한 데다 유통가가 끝없이 추락하면서 포스코는 후판 부문에서 적자를 냈다. 철강업계의 한 관계자는 “산업용 전기료가 올라가고 철광석 가격과 환율이 뛰면서 원가 부담은 늘었지만 후판 가격은 상승하지 않아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며 “철강사들은 후판 가격을 중국산 제품에 관세가 부과된 수준까지 올리며 수익성을 회복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철강사들이 후판 유통가를 올리면서 조선업계와의 후판 가격 협상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할 여지가 커졌다. 철강 업계와 조선 업계는 지난해 9월부터 하반기 후판 가격 협상을 진행하고 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철강사는 업황이 망가질 대로 망가져 후판 가격을 더 이상 낮출 수 없다는 입장인 반면 조선사는 중국산 후판 가격을 기준으로 가격을 낮춰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잠정 관세가 부과된 이후에도 조선사는 보세창고를 통해 중국산 후판을 낮은 가격에 수입할 수 있다"면서도 "국내 후판 유통가격이 계속 오르면 상승분을 협상에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