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가 세계 경제의 화두다. 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출범한 가트(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체제를 대체한 세계무역기구(WTO)가 1995년 닻을 올렸을 때 관세는 시나브로 사라질 운명으로 여겨졌다. 자유무역의 기수인 WTO에 관세는 각국의 보조금과 함께 제1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년 전 예상을 깨고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다시 관세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더니 트럼프 2기를 맞아 세계 경제를 뒤집어놓을 태세다. 트럼프의 폭풍 관세에 올해 30돌을 맞은 WTO는 사망 선고라도 내려야 할 처지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2주 만인 이달 4일 중국 제품이라는 이유로 10% 관세를 추가로 때렸고 캐나다와 멕시코 수입품에는 25% 관세를 다음 달 4일부터 물리기로 했다. 미국의 수입액이 가장 많은 멕시코와 캐나다·중국에 대한 보편관세에 그치지 않고 트럼프는 상호 관세를 통해 미국에 관세를 높게 매기는 나라에는 관세 인상도 예고했다. 무엇보다 국내 기업들에 미칠 영향이 큰 철강·알루미늄 25% 관세 부과를 다음 달 12일부터 시행할 방침인데 다음은 자동차·반도체·의약품 관세라는 위협도 잊지 않았다.
스스로 관세를 신봉한다고 밝힌 트럼프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관세”라며 어이없는 수사까지 동원하는 것을 보면 발등의 불이 된 관세 폭탄의 파괴력은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교주인 트럼프는 “적절하게 쓰면 관세는 많은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며 “관세는 경제뿐 아니라 경제 이외의 것을 얻는 데도 매우 강력한 도구”라고 애정을 표할 정도다.
트럼프가 마가를 명분으로 관세를 ‘최고의 무기’로 휘두르는 것은 미국 기업들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서다. 철강 관세는 한때 미국의 자존심이었지만 쇠락한 US스틸이 일본제철에 팔리는 것을 막고 되살려보려는 시도다. 철강·자동차 관세와 달리 기대효과도 불분명한데 느닷없이 제기된 반도체 관세는 몰락하는 인텔을 떠받치기 위한 포석이다. 인텔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최강자로 자리한 대만의 TSMC는 트럼프의 관세 압박이 거세지자 미국 공장 건설에 이어 인텔에 대한 직접 투자까지 검토 중이다.
‘매드맨(Mad Man·광인)’의 관세 폭주에 한국 기업인들은 비상이 걸렸지만 트럼프의 관세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잘 알기에 서러운 마음이 더 사무친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내수 침체를 극복하려 수출 증대를 모색해온 기업인들은 트럼프처럼 기업을 전폭적으로 도와줄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한국에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전 세계가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을 하는데 우리가 그나마 강점을 지닌 반도체 산업이라도 지원하자는 특별법 제정조차 수개월째 국회에서 잠자는 실정이 아닌가.
지원은 못 할망정 발목은 잡지 않아야 하는데 거대 야당은 24일 국회 법안소위원회에서 100만 개 이상의 기업들에 악영향을 미칠 상법 개정안을 단독 처리했다. 기업 이사의 충실 의무를 법인에서 주주로 확대하는 것이 핵심인데, 이러면 회사가 줄소송 위험에 처하고 툭하면 경영권이 흔들려 기업인으로서는 회사 성장의 동기가 사라진다고 경제 8단체가 호소했지만 야당은 귀를 막은 듯 막무가내다. 대통령도 총리도 없는 외교·통상 공백을 메우려 지난주 워싱턴DC를 찾아 동분서주했던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나 20대 기업 대표들로서는 허망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 정부 인사들을 제대로 상대할 글로벌 기업인 한 명이 아쉬운 상황에서 검찰은 8년간 사법 리스크의 족쇄를 채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사건에서 1·2심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는데도 기계적으로 대법원에 상고해 발을 묶기도 했다. 노조는 트럼프의 관세 피해를 최소화하려다 보면 국내 일자리가 감소할 위기인데 파업을 더 쉽게 할 궁리에 ‘노란봉투법’ 입법에 매달리고, 제1 야당 대표는 노동계 표심만 살피며 두 차례나 대통령 거부권에 폐기된 법안을 또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트럼프의 관세 대응에 힘겨워하면서도 기업인들은 먼저 이 땅에 진정으로 기업을 중시하는 마음이 있는지 묻고 싶어 한다. 기업 때리기만 난무해도 ‘사업보국’의 정신으로 경영에 헌신하는 이들이 트럼프의 관세 앞에서 더는 마음 아프지 않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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