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어 카드를 잃었을 때는 인생에서 제일 힘든 순간이었어요. 골프가 안 되니까 모든 게 힘들어지더라고요. 골프장에서 울기도 하고…. 그때 생각하니 오늘 우승이 더 기쁜 것 같아요.”
10일(한국 시간) 집이 있는 미국 댈러스에 도착해 서울경제신문과 통화한 교포 선수 노예림(24·대방건설·미국)은 성적 부진에 퀄리파잉을 다시 치러야 했던 2023년 말을 떠올리며 새삼 감격해 했다.
노예림은 이날 플로리다주 브레이든턴CC(파71)에서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파운더스컵에서 4라운드 합계 21언더파 263타로 우승했다. 1타 차의 불안한 선두로 최종일 경기를 출발했고 추격자가 통산 15승의 고진영이어서 우승 전망이 밝지만은 않았는데 버디만 3개를 잡아 4타 차로 넉넉하게 데뷔 첫 우승을 달성했다. 상금은 30만 달러(약 4억 3000만 원).
이민 가정의 외동딸 노예림은 열여덟이던 2019년에 포틀랜드 클래식 준우승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선수다. LPGA 투어 비회원이라 월요예선을 거쳤는데 어렵사리 얻은 출전권으로 우승 경쟁을 벌였다. 4홀 남기고 3타 차 선두였으나 1타 차로 통한의 역전패를 당했다. 2018년 미국주니어골프협회(AJGA) 올해의 선수 출신으로 주니어 시절 역전패가 거의 없던 노예림은 LPGA 무대에서 뼈저린 경험을 했다.
2020년 볼런티어스 오브 아메리카(VOA) 클래식에서는 3라운드 17번 홀까지 2타 차 단독 선두였는데 최종 공동 2위에 만족했다. 2020년 신인상 포인트 1위를 차지한 노예림은 팬데믹에 따른 시즌 축소를 이유로 투어 측이 신인상을 시상 부문에서 빼는 바람에 상을 못 받는 불운까지 겪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우승은 118번째 출전 대회인 이번 파운더스컵에서 손에 들어왔다. 3라운드에 8타를 줄이는 몰아치기로 선두를 꿰찼고 과거의 역전패 기억은 잊은 지 오래인 듯 최종 라운드 고비마다 결정타를 날리며 트로피를 틀어쥐었다.
1타 차 2위로 내려앉은 뒤 13번 홀(파4)에서 잡은 버디가 결정적이었다. 티샷을 왼쪽으로 보내 흙바닥에서 두 번째 샷을 했는데 핀 5m쯤에 잘 떨어뜨렸고 원 퍼트로 마무리했다. 고진영이 이 홀 보기를 범하면서 노예림은 1타 차 선두로 복귀했고 다음 홀 3m 남짓 버디와 고진영의 보기에 3타 차까지 달아났다.
노예림은 “돌도 많고 카트도로처럼 딱딱한 곳이어서 그린 가운데만 보고 드로 구질로 쳤는데 바람을 뚫고 낮게 잘 날아갔다. 14번 홀도 똑같은 지면 조건에서 쳤는데 스핀을 잘 먹었다”고 돌아봤다.
LPGA 투어 홈페이지는 노예림의 우승 소식을 전하며 그의 성을 따 ‘Noh Doubt(No Doubt·의심의 여지없는, 틀림없는)’라고 썼다. 노예림도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언제 우승하지’ ‘언제쯤 찾아올까’라는 생각은 했지만 못한다는 생각은 절대로 안 했어요.”
돌파구는 퍼터였다. 2023년 시즌 중 롱 퍼터 중에서도 아주 긴 브룸스틱(빗자루) 퍼터로 바꿨고 적응이 된 지난해 상금 48위(2023년은 122위)로 반등한 데 이어 올 시즌 첫 출전 대회부터 우승 축포를 터뜨렸다. 롱 퍼터로의 교체는 딸을 골프시키면서 함께 입문한 아버지 노성문 씨의 아이디어였다.
실크처럼 부드러운 스윙으로 280야드 장타를 치는 노예림은 약점이던 퍼트를 보완하면서 세계 골프계에 스타 탄생을 알렸다. 그린 적중 때 퍼트 수가 2022년 130위, 2023년 102위였는데 지난해 30위까지 올라갔다. 이번 우승도 퍼트의 힘으로 해냈다. 노예림은 “너무 퍼트가 안 돼서 아예 다른 기분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바꾼 퍼터다. (일반 퍼터와) 느낌이 너무 다르니까 그동안 제가 갖고 있던 문제들을 잊게 되더라”며 “선두를 뺏겼어도 후반 9홀에 기회가 있다고 생각했다. 샷이 좋으니 그린을 많이 적중할 수 있었고 퍼트가 좋으니 홀과 멀더라도 일단 그린에만 올리자는 생각으로 경기할 수 있었다”고 했다.
노예림은 과거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캠퍼스(UCLA)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고도 진학을 포기했고 서던캘리포니아대(USC)의 입학 제안도 사양하면서 프로로 전향했다. 그는 “어릴 때 같이 쳤던 친구들이 이제 막 대학에서 프로로 올라오는데 저는 일찍 프로를 시작해 경험을 쌓았다. 대학 안 간 것에 후회는 없다”고 했다. 상금으로 뭐할 거냐는 물음에 “쇼핑을 좋아하니까 하고 싶은 일이 곧 생길 것”이라며 웃은 노예림은 “올해 몇 번 더 우승하고 싶다. 메이저 대회에서 좋은 성적도 꼭 내고 싶다”고 했다.
고진영은 전반 버디 3개로 한때 선두에 나섰으나 후반 보기만 3개를 범하면서 2위에 만족했다. 상금은 18만 7584 달러(약 2억 7000만 원). 연속 ‘노 보기’ 행진은 95홀까지 이어진 뒤 13번 홀 보기로 끊겼다. 시즌 개막전 공동 4위에 이어 연속 톱5를 기록하면서 투어 16승째가 머지않았음을 알린 고진영은 “많은 훈련으로 거리도 늘었다. 2025년은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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