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금리 하락 효과를 대출 소비자들이 체감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쏟아지자 은행들이 부랴부랴 가산금리 인하에 나선다. 금융 당국이 “이제 대출금리를 낮출 때가 됐다”고 경고하고 야당이 가산금리 산정 체계 관련 은행법 개정을 서두르자 은행들이 서둘러 대출금리 인하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지난해 하반기 가산금리를 높여 대출 문턱을 높였던 것과는 정반대 움직이어서 과도한 정부 개입에 소비자 혼란이 가중됐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은행권, 대출금리 줄인하=30일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은행은 31일 자로 주요 가계대출 상품의 가산금리를 최대 0.29%포인트 낮춘다. 상품별로는 △아파트 주택담보대출(코픽스 지표금리) 0.20%포인트 △전세자금대출 0.01~0.29%포인트 △신용대출 0.23%포인트 등이다.
은행의 대출금리는 은행채 금리, 자금조달비용지수(COFIX·코픽스) 등 시장·조달금리를 반영한 ‘지표(기준)금리’와 여기에 은행들이 임의로 덧붙이는 ‘가산금리’로 구성된다. 은행들은 가산금리에 업무 원가, 법적 비용, 위험 프리미엄 등이 반영된다고 설명하지만 주로 은행의 대출 수요나 이익 규모를 조절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은행권은 지난해 3분기 이후 가계대출 수요 억제를 명분으로 대출 가산금리를 계속 올리다가 약 반년 만인 이달 13일 신한은행이 최대 0.3%포인트 가산금리를 낮추면서 인하 경쟁을 시작했다.
KB국민은행도 27일 은행채 5년물 금리를 지표로 삼는 가계대출 상품의 금리를 0.04%포인트 낮췄다. 가산금리 인하 케이스는 아니지만 시장금리 하락분을 최대한 빨리 대출금리에 반영하자는 취지다. 조정 결과 24일 기준 연 3.86~5.26% 수준인 KB국민은행 고정금리(혼합·주기형) 가계대출 금리는 연 3.82~5.22%로 낮아진다.
앞서 13일 SC제일은행은 ‘퍼스트홈론’의 영업점장 우대금리를 0.1%포인트 올려 사실상 대출금리를 0.1%포인트 내렸고 IBK기업은행도 17일부터 대면 주택담보·전세·신용대출 금리 산정 과정에서 영업점장이 재량으로 깎아줄 수 있는 금리의 폭을 상품에 따라 기존 수준보다 최대 0.4%포인트 키웠다.
◇혼란 키우는 ‘고무줄’ 가산금리=대출금리 하락은 소비자에게 반가운 일이지만 오락가락 가산금리가 소비자 혼란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은행들이 금융 당국의 가계대출 관련 기조를 따르는 수단으로 가산금리를 활용하면서 시장이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 기준 예금은행 대출금리(신규 취급액 기준)는 고정금리형 주담대가 4.31%로 변동형의 4.25%보다 높았다. 고정형 주담대 상품의 금리가 변동형보다 높은 것은 2022년 10월 이후 2년 1개월 만이다. 이는 은행들이 고정형 상품의 가산금리를 인상하며 대출 문턱을 끌어올린 결과다. 그러다 다시 12월에는 고정형 금리의 지표금리인 은행채 5년물 금리가 0.21%포인트 하락하며 변동형 금리(4.32%)가 고정형 금리(4.23%)를 한 달 만에 앞질렀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당국의 가계부채 억제 기조에 따라 지난해 하반기 고정금리 주담대의 가산금리를 인상했는데 그 효과가 12월 축소된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대출 시장의 왜곡은 장기간 이어지고 있는 상태다. 이론적으로 대출 소비자가 금리 인상에 따른 위험을 피할 수 있는 고정형 상품이 변동형 상품보다 금리가 높은 게 정상이다. 하지만 한국은 2022년 10월 이후 지난해 11월 한 달을 빼고는 고정형 금리가 변동형보다 항상 낮았다. 이는 당국이 은행에 고정형 상품 확대를 주문한 데 따른 것으로 은행들은 인위적으로 고정형 상품의 금리를 변동형 상품보다 낮게 유지해왔다.
현재는 소비자들이 시장금리가 추가 인하될 것을 예상하기 때문에 이자가 다소 비싸더라도 변동형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은행들은 고정형 판매를 확대하라는 당국의 주문 탓에 딜레마에 처했다는 분석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리에 대한 당국의 개입은 의도가 좋더라도 소비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으니 그 영향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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