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9일 사상 최대 규모인 24조 3000억 원 규모의 국내 투자 계획을 밝히면서 현대차·기아를 모빌리티 기업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그룹사들의 총력을 투입하겠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특히 전동화 분야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로 경쟁사들을 압도하겠다는 전략이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최고경영자(CEO)는 7일(현지 시간) 외신 인터뷰에서 경쟁사이자 일본의 2·3위 업체인 혼다와 닛산의 합병을 겨냥해 “(자동차 산업에서) 현대차의 위치가 3~4년 전과는 다르다(better place today)”고 말했다. 전동화 역량이 부족한 혼다와 닛산보다 현대차·기아의 현재 경쟁력이 앞서 있다는 것이다.
완성차 기업들은 내연기관차에 집중적인 투자를 하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전기차(EV), 하이브리드차(HEV), 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량(PHEV), 주행거리연장형전기차량(EREV), 수소차량(FCEV) 등 많은 차들 가운데 어디에 역량을 집중할지를 선택할 상황에 놓여 있다. 무뇨스 사장도 “돈을 어디에 투자할지 현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 투자의 방향성에 따라 기업들의 성패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이 이날 발표한 올해 투자 계획에는 과감한 투자로 경쟁사들을 따돌리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현대차그룹은 전 세계 주요 완성차 업체 가운데 내연기관과 하이브리드·전기차·수소전기차를 모두 양산할 수 있는 유일한 업체로 평가받는다. 전기차는 독자 플랫폼인 E-GMP를 활용해 소형 전기차부터 아이오닉9·EV9과 같은 대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형 전기차까지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하이브리드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현대차·기아는 친환경차 경쟁력을 앞세워 미국에서 테슬라에 이어 전기차 시장 2위를 기록 중이고 하이브리드차 판매도 매년 20% 이상 뛰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연구개발(R&D)에만 11조 5000억 원을 투자해 한 단계 더 진화한 전동화 역량을 갖출 방침이다. 올해 R&D 투자로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과 EREV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기아는 이르면 올해부터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인 TMED-II를 적용한 하이브리드차를 시장에 내놓을 계획이다. TMED-II는 배터리 용량이 커지면서 현재 생산되는 하이브리드차에 비해 성능과 연비가 크게 개선된다. 이뿐만 아니라 차량의 전력을 외부로 전달할 수 있는 ‘V2L(Vehicle-to-Load)’ 기술도 적용된다. 현대차·기아의 하이브리드차를 타는 고객은 캠핑과 같은 활동을 하며 V2L을 통해 전기차 기술을 경험할 수 있다. 차세대 하이브리드차가 자연스럽게 전기차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고성능 전기차 아이오닉5, 웨이모의 로보택시 공급으로 세계 최고 경쟁력을 입증한 현대차그룹의 전기차는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으로 전환이 빨라진다. SDV는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인 차량을 제어하고 관리하는 차다. 높은 수준의 자율주행 기술과 무선업데이트(OTA) 기술이 기본으로 장착된 테슬라의 모델 시리즈가 대표적인 예다.
현대차그룹은 올해 R&D에 속도를 내 내년까지 통합 소프트웨어를 내재화한 SDV 페이스 카(Pace Car) 개발 프로젝트를 완료할 계획이다. SDV는 E-GMP에 이은 차세대 전기차 플랫폼인 eM·eS와 연동된다. 통합된 소프트웨어로 각 차량을 제어하는 SDV와 차세대 플랫폼이 결합하면 제조 원가는 줄고 차량의 인터페이스는 향상된다.
SDV가 양산되면 전기차 기술에서 뒤처졌다고 평가받는 완성차 업계 1위 도요타와 2위 폭스바겐, 또 합병을 앞둔 혼다·닛산과의 격차가 더욱 벌어질 수 있다. GM의 전기차 플랫폼을 가져다 쓰는 혼다는 8일(현지 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한 CES 2025에서 독자 플랫폼인 ‘혼다 제로’를 공개하고 2026년 출시를 예고했다. 이 시점에 현대차·기아는 차세대 전기차 플랫폼과 SDV가 완성된다. 나아가 현대차는 2030년 경제형부터 럭셔리, 고성능까지 21개 모델, 기아도 2027년까지 다양한 목적기반차량(PBV)을 포함해 15개 모델의 전기차 풀라인업을 갖춘다.
현대차그룹은 12조 원을 투자해 미래차에 걸맞은 생산 시설도 확충한다. 기아가 화성에 전기차 전용 공장인 이보(EVO) 플랜트를 완공하고 현대차는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울산 EV 전용 공장 건설에 속도를 낼 예정이다. 현대차 울산 공장에는 혁신 제조 기술로 평가받는 하이퍼캐스팅 공장을 신설한다. 하이퍼캐스팅은 차체를 통째로 제조하는 첨단 공법으로 이 기술을 이용하면 전동화 차량 등의 제품 성능을 높일 수 있다. 현대차는 또 8000억 원을 투입해 자율주행과 인공지능(AI) 등 핵심 미래 사업 경쟁력에 대한 전략 투자를 이어갈 방침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안전하고 자유로운 이동과 평화로운 삶’이라는 인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대내외 경영 환경에 흔들리지 않겠다”며 “적극적인 투자, 끊임없는 체질 개선, 변화와 혁신으로 미래 성장 동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해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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