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2년 일본 교토 오야마자키초의 암자인 묘키안에 작은 다실(茶室)이 지어졌다. 허름한 초가집의 내부에는 1평 남짓의 단칸방이 있었다. ‘다이안’으로 불린 이 방은 당대 권력자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도 스승이자 조선 출병을 반대했던 멘토인 센노 리큐가 지은 45채의 다실 중 하나다. 도요토미도 3년 뒤 본거지 오사카성에 금박으로 도배한 황금 다실을 지었으나 센노 리큐로부터 진정한 다도를 모른다는 핀잔을 들었다. 오늘날 국보로 지정돼 있는 일본 다실 3곳의 명단에는 황금 다실이 아닌 다이안이 들어 있다. 이처럼 화려함을 좇기보다 간소하고 투박한 모습에서 자연스러운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일본 전통 미학을 ‘와비사비’라고 일컫는다. 와비(侘)는 간소하고 한적한 정취를, 사비(寂)는 고풍스럽고 은근하게 깊이 있는 정감을 뜻한다.
와비사비는 덧없는 세상과 인간의 결함마저 너그럽게 포용하며 그 본질적 가치를 재발견하는 선불교적 수행 자세에서 유래됐다. 그 정신이 다도·예술·철학·건축 등으로 전파돼 지식인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조선 시대 우리 선조들이 막그릇으로 썼던 분청사기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 26호 찻잔인 ‘기자에몬 이도다완’ 등으로 이름 붙여지며 귀하게 다뤄진 것도 와비사비 미학 덕분이다. 그 기류는 불필요한 물품 구매를 지양하고 낡은 물건을 고쳐 소중히 쓰는 소비 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가 최근 자신의 X 계정에 ‘와비사비’라는 문구를 올렸다. 머스크가 내년 1월 출범하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정부효율부(DOGE)’ 수장으로 내정된 만큼 이번 메시지는 불필요한 재정지출을 줄이고 비효율적 정부 조직과 규제를 개혁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풀이된다. 우리 정부와 여야 정치권도 방만한 행정조직 군살 빼기, 나랏빚 늘리는 선심 정책 자제, 낡은 규제 혁파 등을 위해 뜻을 모아야 한다. 그래야 혁신과 도전으로 우리 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경제 재도약을 할 수 있다.
/민병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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