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과 한국거래소가 연중 내내 좀비기업 신속 퇴출 등을 강조하고 있으나 정작 중대 금융 범죄인 분식회계 기업 퇴출에는 소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분식회계에 대한 적절한 제재 없이 형식적 상장폐지 요건만 강화하면 오히려 분식회계만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21일 금융감독원 전자 공시 시스템에 따르면 2019년 이후 5년 동안 증권선물위원회가 회계 기준 위반으로 검찰 통보·고발한 상장사 33개사(비상장사 및 검찰 통보·고발 않거나 실질심사 중인 곳 제외) 가운데 현재 상장폐지된 기업은 8곳이다. 이 가운데 분식회계를 주된 이유로 상장폐지가 결정된 기업은 행남사(2019년 7월), 녹원씨앤아이(2021년 3월), 퀀타피아(2023년 12월) 등 3곳뿐이다. 나머지 상장폐지 기업은 감사 의견 거절이나 자진 상장폐지 등이 주요 원인이다.
상장폐지는 일정 요건에 부합하면 상장폐지 절차를 진행하는 형식적 상장폐지와 개선 기간을 부여한 후 기업심사위원회·시장위원회 등을 통해 상장폐지 여부를 결정하는 실질 심사로 나뉜다. 회계 기준 위반은 증선위가 검찰에 통보·고발하는 중대 사안만 상장폐지 실질 심사 사유에 해당한다. 이후 거래소는 기업 계속성이나 재무 안정성 등을 고려해 상장 유지를 결정한다.
상장폐지는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신중히 결정해야 하지만 현재 결정은 분식회계 제재보다는 투자자 보호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고 있다는 지적이다. 더구나 한국 증시가 시장 규모에 비해 상장기업 수가 지나치게 많아 저평가된다는 문제가 꾸준히 지적되는 만큼 분식회계 기업조차 적시 퇴출하지 않고서는 시장 정화가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상장폐지가 능사는 아니라는 반대 목소리도 크다. 대규모 분식회계로 적발됐으나 한화그룹 인수 이후 실적 회복 중인 대우조선해양이나 법원에서 증선위 제재가 취소된 삼성바이오로직스 등 상장 유지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분식회계를 하더라도 시장 퇴출 사례가 거의 없다 보니 자본잠식 등 형식적 상장폐지 사유를 피하려 분식회계를 하는 기업도 속출할 수 있다. 안 걸리면 좋고, 걸리더라도 상장폐지를 피할 기회가 여러 차례 생기는 데다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할 시간까지 벌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3월 금융감독원은 대규모 손실이 발생하자 분식회계로 상장폐지 요건을 피한 후 수천억 원 대 자금을 조달한 기업 등 불공정 사례를 적발한 뒤 조사·공시·회계 합동 대응 체계를 만들어 연중 집중 조사 중이다.
상장폐지까지 이어지지 않더라도 퇴출 절차가 길어지면서 시장 유동성이 묶이는 문제도 있다. 이상복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결국엔 어떤 방식으로 투자자를 보호할 것이냐 하는 정책 판단의 문제”라며 “분식회계 정도가 중대하고 명백하다면 해당 기업을 상장폐지하는 방향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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