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현대음악에 ‘우연성 음악(chance music)’이라는 특이한 장르가 있다. 계획되지 않은 현장의 돌발성이 주는 창의성이 특징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연성’은 ‘의도된 우연성’일 뿐 결코 우연적인 음악은 아니다. 치밀하게 계산된 프로젝트 음악이라는 뜻이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미국의 존 케이지가 꼽힌다. 우연성 음악의 동조자 가운데는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 백남준도 포함된다. 장르를 넘나드는 백 작가의 천재성에 놀랄 뿐이다. 우연성 음악의 상징적인 곡은 케이지의 대표작 ‘4분 33초’인데 지난달 방한한 러시아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가 서울 롯데콘서트홀 공연에서 앙코르 곡으로 이 작품을 재현했다.
굳이 재현했다는 표현을 쓴 것은 그가 앙코르 곡을 들려줄 때 피아노 건반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이다. 케이지의 ‘4분 33초’를 알고 있는 클래식 애호가라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것이다. 피아니스트 트리포노프는 피아노 앞에 4분 남짓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은 채 앉았다가 일어났다. 의아해 하던 관중들은 잠시 후 그가 ‘4분 33초’를 연주한 것을 깨닫고 박수로 환호했다. 케이지가 1952년에 발표한 피아노 작품 ‘4분 33초’는 연주자가 건반을 건드리지 않은 채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동안 연주회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가 곧 음악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최근 대중문화계의 가장 큰 화제는 단연 어도어 사건이다. 엄밀히 말하면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 간담회라고 해야 더 정확하다. 그녀의 기자 간담회는 모든 상식을 깨버렸다. 그녀가 입고 나온 옷은 기자 간담회의 정석에서 벗어나도 크게 벗어났다. 덕택에 그 복장은 기자 간담회 내용만큼이나 화제가 됐다. 한국 미디어 역사상 2시간 넘는 생중계 방송을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간 인물은 없었다. 16년 전 가수 나훈아의 바지(?) 기자 간담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이 기자 간담회로 마녀 프레임에서 단번에 벗어났다.
기자 간담회가 끝나고 세간의 여론은 많이 갈린다. 기자 간담회를 보고 나서 문득 궁금해진 게 있다. 과연 기자 간담회의 그 특이한 콘셉트와 내용은 우연적인 것이었을까. 아니면 치밀하게 계산된 것이었을까. 정확한 답은 민 대표만이 알겠지만 케이지의 음악처럼 ‘계획된 우연성’이라는 점에 방점을 찍고 싶다.
어도어와 하이브의 갈등 관련 뉴스가 꼬리를 물면서 민 대표를 옹호하는 입장과 하이브 편을 드는 의견들이 팽팽하게 맞선다. 여기서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은 틀리다며 편을 가를 생각은 없다. 다만 분명히 말하고 싶은 점은 민 대표의 사심이 아니라 진심을 믿고 싶다는 것이다. 또한 민 대표의 진심을 믿는 만큼 방시혁 하이브 의장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K팝 발전에 대한 순수한 마음도 믿는다는 점이다. 방 의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K팝 음악이 위기라고 표현했다. K팝의 위기라는 그의 말을 부정하고 싶지만 최근 음반 수출 시장과 대중음악의 흐름을 본다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민 대표의 기자 간담회가 국내 미디어의 메인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즈음 미국의 음악 미디어 빌보드에서는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화제였다. 그녀의 새 앨범 수록 14곡이 빌보드 ‘핫 100’ 1위부터 14위까지 순위를 휩쓸었다. 스위프트의 성공을 보면서 감탄사를 터뜨리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닌데 이번 앨범은 경외의 대상이다.
이런 아티스트가 과연 우리나라에서 나올 수 있을까. K팝 걸그룹이 빌보드 핫100의 1~10위를 싹쓸이하는 순간이 올까. K팝과 대중문화에 대한 민 대표와 방 의장의 진심을 사심 없이 그대로 믿을 수 있다면 이런 꿈 같은 일은 현실이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세간에는 민 대표의 사심을 읽는 의혹의 시선이 적지 않다. 물론 민 대표가 통렬하게 지적한 것처럼 K팝 아티스트들을 기업의 부속품처럼 여기는 성과중심주의적인 구태가 한국 대중문화 발전에 질곡이 될 수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이번 사태는 두 K팝 빅 크리에이터의 진심이 갖는 양면성의 충돌이라는 희망에 믿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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