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에서 마이크론으로 이직한 전직 연구원을 상대로 낸 하이닉스의 전직금지 가처분에 대해 법원이 인용했다. 경쟁사로 옮기면서 기술을 탈취하는 행태에 대해 법원이 제동을 건 것인데, HBM을 둘러싼 기술경쟁이 그만큼 치열하다는 얘기다. 반도체 업계의 첨단 기술 경쟁이 격화하며 해외 경쟁 업체로의 기술 유출 우려도 그만큼 커졌다는 의미다.
7일 법조계와 반도체업계 등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제50민사부(재판장 김상훈)는 최근 SK하이닉스가 전직 연구원 A씨를 상대로 낸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하고 위반 시 1일당 1000만 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현재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을 선점하고 있는 가운데 A씨가 SK하이닉스에서 근무하며 얻은 정보가 경쟁사인 마이크론으로 흘러갈 경우 SK하이닉스의 경쟁력 훼손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서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채무자(A씨)는 오는 7월 26일까지 미국 마이크론과 각 지점, 영업소, 사업장 또는 계열회사에 취업 또는 근무하거나 자문계약, 고문계약, 용역계약, 파견계약 체결 등의 방법으로 자문, 노무 또는 용역을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A씨는 현재 마이크론 본사에 임원 직급으로 입사해 재직하고 있다.
HBM 기술 놓고 백척간두 경쟁인데…SK하이닉스 개발자, 마이크론 임원으로
SK하이닉스에서 D램과 HBM 설계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A씨는 2022년 7월 SK하이닉스를 퇴사하고 이후 미국 마이크론에 임원급으로 이직했다. A씨는 SK하이닉스 퇴직 무렵 마이크론을 비롯한 경쟁업체에 2년간 취업하거나 용역·자문·고문 계약 등을 맺지 않는다는 내용의 약정서도 작성한 상태였다.
이에 서울중앙지법은 SK하이닉스가 A씨를 상대로 낸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업계에서는 A씨의 전직금지 약정이 5개월 정도 남은 가운데 이 같은 가처분이 받아들여진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인공지능(AI) 반도체의 핵심으로 꼽히는 HBM은 D램 여러 개를 수직으로 연결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끌어올린 고성능 메모리로, AI 시장 확대로 폭발적인 성장세가 예상된다.
HBM은 1세대(HBM)-2세대(HBM2)-3세대(HBM2E)-4세대(HBM3)-5세대(HBM3E) 순으로 개발되고 있다. 현재 HBM3를 엔비디아에 사실상 독점 공급하는 SK하이닉스가 시장 주도권을 쥐고 있다.
최근 마이크론이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보다 앞서 5세대 HBM3E 양산 소식을 가장 먼저 내놓고 삼성전자가 마이크론 발표 직후 업계 최초로 12단 36기가바이트(GB) HBM3E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히는 등 차세대 개발·양산 경쟁이 격화하고 있다.
A씨가 임원으로 이직한 마이크론은 글로벌 3위 메모리 제조사로, HBM 시장에서 존재감이 미미했지만 지난해 10월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HBM 시장 진출을 선언하고 반격에 나섰다. 업계 관계자는 "HBM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인 마이크론이 특히 공격적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인력을 영입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갈수록 커지는 핵심 기술 해외 유출 우려…고강도 대책 내놔야
반도체 업계에서는 핵심 기술의 경쟁 업체 유출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어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의 영업비밀인 반도체 공장의 설계 도면을 빼내 그대로 본 뜬 반도체 공장을 중국에 세우려 한 혐의로 삼성전자 전 임원이 적발돼 업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삼성전자 자회사인 세메스 전 연구원 등은 세메스의 영업기밀을 이용해 반도체 습식 세정장비를 만들어 수출했다가 적발돼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다른 업체로 이직을 준비하던 삼성전자 엔지니어가 국가 핵심기술이 포함된 중요 자료를 모니터 화면에 띄워놓고 이를 사진 촬영해 보관하다 적발된 사례도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가핵심기술'을 포함한 전체 산업 기술의 해외 유출 적발 사건은 전년보다 3건 증가한 23건으로 집계됐다. 이중 절반 이상인 15건이 반도체 분야에서 나왔다. 최근 5년간 전체 산업 기술 유출 적발 건수는 총 96건으로,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NISC)가 2003년부터 작년 7월까지 20년간 집계한 산업기술 해외 유출은 총 552건으로, 피해 규모는 100조 원 이상인 것으로 추산된다.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퇴사한 핵심 기술 인력이 경쟁 업체로 이직한 사실을 파악하기 쉽지 않은 데다, 이를 알아내고 전직금지 가처분 등을 내도 법원의 인용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수개월의 시간이 걸리는 만큼 사실상 속수무책인 경우가 많다.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로 지적된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1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총 33건 중 무죄(60.6%)와 집행유예(27.2%)가 전체의 87.8%였다. 2022년 선고된 영업비밀 해외 유출 범죄의 형량은 평균 14.9개월에 불과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