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대표적인 준(準)재정활동인 금융중개지원대출의 한도유보분을 내년 상반기까지 9조 원이나 남겨두기로 했다. 사용 목적이 정해져 있지 않은 예비비 성격의 한도유보분을 이 정도 큰 규모로 남겨 운용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금통위는 내년 상반기까지 통화 긴축의 부정적 영향이 더 크게 발생하는 곳에 지원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물가안정을 위해 일부러 수요를 위축시키는 긴축 과정에서 고금리 영향을 받는 곳에 발권력으로 선별 지원하겠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통화정책 칼자루를 쥔 금통위가 되려 긴축 효과를 크게 우려하는 모습이다. 금통위가 이토록 긴축을 우려할 정도라면 금리를 더 올릴 가능성이 없고, 내년 상반기 중 경제·금융에 어려움이 생기더라도 금리를 내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금리 인하 대신 금중대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한은 금통위는 지난달 30일 기준금리를 연 3.50%로 7연속 동결하면서 동시에 금중대 한도 조정을 의결했다. ‘한국은행의 금융기관대출규정’에 따르면 금중대는 금융기관이 중소기업 등에 대한 금융중개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대출이다. 한은은 은행에 공급하는 대출 총한도를 미리 정하고 일정 기준에 따라 은행별로 한도를 배정하는 방식으로 금중대를 운용하고 있다.
금중대 특징 중 하나는 저금리라는 점이다. 한은이 은행에 공급하는 금중대 금리는 2.0%다. 기준금리 3.5%보다 1.5%포인트 낮을 뿐만 아니라 지난 10월 예금은행의 중소기업 가중 평균 대출금리(신규취급액 기준) 5.35%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다만 한은이 자금을 저금리로 공급하더라도 은행 수수료 등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2.0%보다 높은 수준에서 대출이 이뤄진다.
금통위는 금융·경제 상황이나 중소기업 자금 사정 등을 고려해 총한도나 프로그램별 한도, 한도유보분 등을 수시로 조정한다. 특히 한도유보분은 사용 목적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일종의 예비비 성격이다. 한은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피해기업이나 소상공인 등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한도유보분을 19조 원을 더 늘려 운용했다. 한도유보분을 제외한 무역금융 지원(1조 5000억 원), 신성장·일자리 지원(13조 원), 중소기업 대출 안정화(3000억 원), 지방중소기업 지원(5조 9000억 원) 등 나머지 4개 프로그램은 각각 목적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금통위는 코로나19 관련 한시적 지원 조치가 종료되면서 한도유보분에 대해 12월 1일부터 19조 1000억 원에서 1000억 원으로 19조 원을 줄이기로 정했다. 코로나19 피해기업 지원 13조 원과 소상공인 지원 6조 원 등 19조 원 모두 2022년 9월 30일 자로 신규 취급이 종료됐을 뿐만 아니라 기존 대출 취급분에 대해서도 최대 만기 1년 이내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긴축이 지속되는 가운데 코로나19 지원 관련 대출이 없는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늘려 놓은 한도유보분을 다시 줄이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서 금통위는 예상치 못한 결정을 내렸다. 한도유보분을 19조 1000억 원에서 9조 3000억 원으로 9조 8000억 원만 줄인 것이다. 태풍·산불 등 자연재해에 따른 피해 지원 여력을 추가 확보할 수 있도록 재해복구특별지원을 1000억 원에서 3000억 원으로 늘린 것을 감안하면 어디에도 쓸 데가 없는 한시적인 예비 한도를 9조 원 남겨둔 것이다. 재해복구특별지원을 목적 예비비로 본다면 한시적 예비 한도 9조 원은 일반 예비비다. 쓸 곳을 정해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쓸지 말지도 모르는 돈이다.
이와 관련해 한은은 “대내외 불확실성이 높은 가운데 통화 긴축 기조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경우 부정적 영향을 상대적으로 더 크게 받는 부문 및 지역을 지원할 수 있도록 9조 원을 한시적인 예비 한도로 확보했다”며 “한도유보분을 활용한 프로그램의 가동 여부, 지원 결정 시 지원 규모나 기간, 대상, 방식 등은 추후 금융·경제 상황을 보며 검토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번 조치가 이례적인 건 ①한도유보분의 활용 목적을 전혀 정해두지 않았고 ②코로나19와 같이 경제·금융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특정 이벤트도 전혀 없이 ③긴축 기조와 상반되는 효과를 낼 수 있는 조치를 내놨다는 점이다. ④지원 대상에 ‘지역’을 포함한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금중대 본래 취지가 신용 공급이 부족한 부문에 은행 자금중개 기능이 강화되도록 지원하는 중앙은행 대출제도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번 조치가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현재 고금리를 통해 긴축 효과를 의도하는 상황에서 취약 부문으로 자금이 공급된다면 긴축 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고금리로 어려워진 취약계층을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건 이창용 총재도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정부와 재정의 역할이다.
금중대가 정책금융 성격을 지닌 준재정활동이라는 측면에서도 이번 조치가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 금중대 등 준재정정책은 정부의 일반 재정정책과 비교했을 때 국회에 따른 예산 확정이나 결산 심사 등 민주성 확보를 위한 일련의 조치를 거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돼 왔다. 금통위가 목적을 정해두지도 않는 9조 원을 쌈짓돈처럼 만들어놓고 특정 부문에 지원한다는 건 민주적 통제를 회피해 발권력을 오남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금통위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향후 의사록이 공개돼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겠으나 현재로서는 몇 가지 추측만 가능하다. 먼저 한도유보분 19조 원을 한 번에 다 줄여놓으면 나중에 다시 늘릴 때 긴축에서 완화로 전환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는 내년 상반기 중 우리 경제·금융 상황에 실제로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봤을 가능성이다. 최대 9조 원 규모의 발권력을 즉각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의 문제가 생길 수 있어 이례적 조치를 감행했을 수 있다. 금중대가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을 위한 프로그램인 만큼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에 대한 지원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한시적 예비 한도 9조 원을 내년 7월 이후 없애기로 한 것도 상반기 이후면 통화 긴축 기조가 전환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하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한은 관계자는 “상반기 이후 통화 긴축 기조가 바뀐다는 신호가 절대 아니다”라며 “워낙 불확실하니깐 상반기까지 조금만 더 지켜보자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통화 긴축의 부정적 영향을 완충해주는 정도이지 경기를 부양하자는 용도도 전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이를 통화정책과 연관을 지을 개연성도 충분하다. 내년 중 물가가 잡히지 않았는데 경기 상황이 급격히 안 좋아진다면 금리를 내리기보단 금중대를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물가가 낮아지고 경기 상황이 어려워졌는데 가계부채 등으로 금리를 섣부르게 내릴 수 없는 상황도 가능하다. 그럴 때도 금중대를 활용할 가능성이 커졌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