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참여정부부터 20년 동안 최상위 국정과제로 추진된 지역균형발전에 제동을 걸었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공공기관들을 지방 각지로 이전하는 등 20년 동안 160조 원이 넘는 예산을 투입했으나 수도권 집중만 더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2015년 이후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확대되면서 집중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
한은이 낸 대안은 부산, 대구, 광주, 대전과 같은 비수도권의 대도시 수준을 끌어올리는 ‘거점도시론’이다.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되는 건 고학력 청년들이 몰리기 때문인데 이는 서울 일극화(一極化)가 심화하면서 지방에 있는 대도시들이 인구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한 주장이다. 모든 지역에 공평하게 예산을 배분하지 말고 거점도시 중심의 효율적인 발전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은 안팎에서는 이번 보고서가 그동안 볼 수 없을 정도로 과감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거점도시가 될 만한 대도시를 직접 거론하는 걸 피하는 등 한은 특유의 신중한 모습도 여전하다. 또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당이 추진하는 ‘메가서울’과도 결이 맞지 않으나 이에 대해 관련이 없다며 극구 부인하는 모습이다.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이번 보고서를 다시 살펴봤다.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는 수도권 집중화가 심화하고 있다. 국토 11.8%인 수도권에 인구 50.2%가 집중돼 있다. 수도권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6개국 가운데 가장 높다. 반면 2~4위 도시를 합산한 비중은 16위로 중하위권이다.
수도권 집중이 나타나는 건 지역간 이동에 주로 기인하는데 주로 청년층(15~34세) 이동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2015년 이후 지역 간 이동이 확대되는데 수도권 인구증가의 78.5%가 청년 유입이다. 호남, 대구·경북, 동남권 인구 감소의 87.8%, 77.2%, 75.3%는 청년 유출이다.
비수도권에서 청년이 빠져나오는 건 과거부터 있었으나 2015년 이후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 한은은 보고서에서 “공교롭게도 2015년은 전국 생산에서 수도권이 차지하는 비중이 50.3%로 절반을 넘어간 첫해”라고 덧붙였다.
한은은 이동의 질적 측면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같은 수의 인구이동이라도 인적자본 수준에 따라 지역 생산성에 미치는 영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로 2020년 중 동남권에서 수도권으로 유출된 청년층은 단순 인구 수로 비교하면 1.28배 증가했으나 인적자본 기준으로는 1.65배 증가했다. 유출 인구 가운데 대졸 고학력자 비중이 과거보다 커졌다는 의미다.
청년들이 서울 등 수도권으로 몰리는 이유는 기대소득과 함께 문화·의료 등 서비스의 지역 간 격차가 커졌기 때문이다. 경제적 요인과 사회·문화적 요인이 동시에 나타난 결과인 셈이다. 특히 2015년 이후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임금, 고용률, 성장률 격차가 커지면서 청년 유출이 심화됐다고 평가했다.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비수도권 주력 산업이 성장하면서 청년 이동이 줄어드는 듯 했으나 정보통신(IT) 산업 등 집적 경제가 발전하면서 수도권 집중이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수도권에 집중된 온라인 쇼핑업체들이 전국 시장을 장악하면서 비수도권 점포소매업 매출과 고용을 크게 위축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월평균 실질임금 격차는 2015년 34만 원에서 2021년 53만 원으로 크게 확대됐다. 고용률 격차도 3.8%포인트에서 6.7%포인트로 벌어졌다. 1만 명당 문화예술활동건수 격차는 0.77건에서 0.86건, 1000명당 의사 수는 0.31명에서 0.45명으로 거의 모든 부분에서 확대됐다. 취업 등을 통해 돈을 벌기 위한 것은 물론이고 문화생활을 즐기는 것이나 아팠을 때 병원을 찾을 때도 서울이 다른 도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리하다.
한은은 “국가 내 수도의 경쟁 우위를 당연한 현상이지만 이외 다른 대도시가 어느 정도만 경쟁력을 유지한다면 청년이 수도로만 집중되지 않을 것”이라며 “그러나 우리나라는 서울 일극 체제가 공고해지면서 주변에서 인구를 끌어들여야 할 다른 대도시들이 제 역할을 못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수도권으로 청년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은 왜 문제가 될까. 당장 청년층은 다른 연령보다 출산율이 높을 뿐만 아니라 상당 기간 가임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출생아 수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한은 분석 결과 2001년부터 20년 동안 누적된 여성 이동이 2021년 출생아 수 감소에 미친 영향은 호남권이 1만 2000명, 동남권 7900명, 대경권 72000명 순으로 나타났다. 호남권에서 청년 유출이 없었다면 2021년 출생아 수가 실제보다 50% 늘어났을 것이란 의미다.
수도권 인구밀도가 상승하면서 출산율이 낮아지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인구밀도가 높을수록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적자본 투자로 출산이 지연되기 때문에 수도권 출산율은 다른 지역보다 낮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합계출산율 기준으로 서울 0.63명, 서울 포함 수도권 0.76명, 광역시 0.81명, 도지역 0.94명인 것이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다.
한은은 수도권에서 청년 유입으로 증가한 출생아 수가 2만 5000명으로 비수도권의 출생아 수 감소(3만 1000명)를 상쇄하지 못해 전국적으로 6000명의 인구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했다. 동시에 서울 등 지역에 인구밀도 상승으로 인한 추가 출산 손실도 4800명 수준이다.
또한 비수도권 지역의 일방적인 청년 유출과 수도권 집중은 지역 간 격차를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양극화는 국가 경제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서울도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한정된 자원에 대한 경쟁이 격화돼 개인 삶의 질이 떨어지고 제한적인 주택 공급으로 집값이 높은 수준이 지속된다. 또한 살아남기 위한 인적자본 투자로 막대한 교육비용이 들어가는데 좋은 일자리를 향한 경쟁은 여전히 치열한 상황이다.
수도권 집중이 어제오늘 일이 아닌 만큼 정부도 손을 놓고 있지만 않았다. 우리나라 균형발전 정책은 2003년 최상위 국정과제로 격상된 이후 4차 계획까지 추진됐고 현재 5차(2023~2027년) 국가균형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세종시 일대에 추진 중인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과 혁신도시 건설 등이다. 이에 한국전력공사가 전남 나주, 국민연금공단이 전북 전주, 한국주택토지공사(LH)가 진주 등에 자리를 잡게 됐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에 따르면 지역균형발전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한 이후 매년 5조~10조 원 이상의 예산이 투입되고 있다. 2005년 5조 4000억 원 규모의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를 만든 이후 2022년까지 18년 동안 164조 2000억 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이로 인한 결과는 앞서 언급했듯이 수도권 집중화 가속화다. 한은은 “수십 년간 균형발전 정책에도 수도권 집중이 멈추지 않는 현 상황을 보면 지금과 같은 정책 방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옳은지 의문이 제기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날 문윤상 한국개발연구원(KDI) 거시·금융정책연구부 연구위원도 이러한 방식의 지역균형발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2014~2015년 공공기관 이전이 집중됐는데 2017년부터 혁신도시에서 다시 수도권으로 인구 순유출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문 위원은 “행정안전부가 인구 감소 지역 89개를 지정한 뒤 10조 원을 편성했는데 지방소멸대응 기금이 어떻게 사용되나 보면 그냥 나눠주는 수준”이라며 “형평성 중심으로 지역발전 정책이 추진되기 때문에 효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국에 10곳이 넘는 혁신도시의 경우에도 이를 분산하지 않고 한 곳에 모았을 때 경제적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났다는 연구 결과도 언급했다.
핵심은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격차를 줄이는 것이다. 한은은 비수도권에서 집적 이익을 최대화하려면 일정 지역에 자원과 인프라를 대규모로 집중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평가했다. 이런 것들이 가능한 곳은 이미 상당 규모를 갖추고 지역 중심지 역할을 어느 정도 하고 있는 대도시다.
전국을 7개 권역으로 나눴을 때 수도권, 강원, 제주를 제외한 동남, 충청, 호남, 대경 등 4개 권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이 유력한 곳이다. 이날 문 위원도 “모든 지역을 다 살릴 수 있는 시기가 지났다”며 “광역시급 도시가 발전하지 않으면 지방은 희망이 없다”고 평가했다.
한은은 해외 사례를 봐도 비수도권 지역이 비슷한 규모를 가지는 것보다 일부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집중되는 것이 수도권 팽창을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다. OECD를 살펴보면 2~4위권 거점도시가 커질수록 수도권 비중이 낮아졌다. 특히 일본은 지방소멸위기에 대응하면서 2010년대 이후 도쿄권 이외 10대 도시로의 순유입이 증가한 반면 도쿄권으로 인구 유입은 감소했다. 일본은 거점도시로 할 만한 곳이 오사카, 후쿠오카, 나고야 등이 있다.
한은이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이동은 줄고 거점도시로 이동이 크게 늘어나는 상황을 시뮬레이션한 결과 30년 후인 2053년 수도권 인구 비중은 49.2%로 절반 아래로 하락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지역 간 출산율 차이에 따른 효과로 전국 인구가 약 50만 명 늘어나는 것으로 추정했다. 한은 관계자는 “최근 거점도시들이 중심지 기능을 점차 회복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며 “주요 사회간접자본(SOC), 문화·의료시설, 공공기관 이전 등을 거점도시에 집중하고 거점도시와 인접 지역을 통합 관리하는 광역기구 활성화와 함께 권역 내 이동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보고서는 한은에서 처음으로 개최한 ‘지역경제 심포지엄’을 통해서 발표됐다. 한은이 지역경제에 관심을 갖는 이유에 대해 이창용 한은 총재는 지역 균형 발전이 통화정책의 수행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라는 입장이다.
이 총재는 “지역별로 경제 여건에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할 수 있지만 과도하면 통화신용정책과 재정정책 영향으로 경제주체들이 체감하는 경기, 물가, 금융 여건 등이 지역별로 크게 차별화할 수 있다”며 “지역 간 격차가 벌어지면 통화정책 수행이 제약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총재는 “통화정책은 무딘 칼이기 때문에 국가 전체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차별적인 영향이 나타나면 국민적 공감대가 달라지면서 지지도도 달라질 수 있다”며 “지역 간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 국민 경제의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사안”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최근 여당을 중심으로 김포시를 서울에 편입하는 ‘메가서울’ 구상이 본격화하면서 공교롭게도 한은이 주장하는 수도권과 비수도권 격차 완화와 다른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한은은 “수도권 집중이 출산율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수도권 집중 심화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등 문제의식을 드러내면서도 수도권 집중으로 이어질 수 있는 ‘메가서울’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연구진은 “메가서울과는 별개로 진행한 연구”라며 “우리 연구는 수도권 집중도를 낮추자는 것으로 메가서울이 수도권 집중을 초래할 것인지 평가하기 어렵고 메가서울에 반대한다고 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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