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공대·의대를 대폭 강화하고 있는 고대에 올 6월 익명의 독지가가 630억 원을 기부해 관심을 끌었다. 고대 안팎에서는 이 기부자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라는 얘기가 돌고 있다. 올 상반기 현대차·기아의 영업이익은 14조 원을 넘어 세계 1위 도요타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물론 대기업이나 재벌 오너가 이런 거액을 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설왕설래가 이어진다. 630억 원은 국내 대학 기부금 역사상 단일 기부액으로 최고 수준이다. 고대 경영학과를 나온 정 회장은 지난해 초 고대 졸업식 축사에서 정주영 전 현대 회장을 추억하며 “할아버지는 ‘청년 시절 지금의 본관 신축 공사에서 돌 나르는 일을 직접 했다. 내가 고대를 지었다’고 자랑스러워 하셨다”며 “‘어떤 실수보다 치명적인 실수는 도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앞서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2021년 고대의료원에 ‘정몽구 백신혁신센터’ 설립·운영 자금으로 사재 100억 원을 기부했다.
고대에는 구자열 LS 이사회 의장과 승명호 동화그룹 회장이 올 7월 각각 100억 원씩을 내놓는 등 기부 행렬이 이어진다. 이 대학은 지난해에도 사립대 기부금 유치 1위를 기록했다.
대학 측은 자연과학·공학·의학 분야 지원을 강화해 10년 내 노벨상·필즈상·튜링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도록 한다는 포부다. 특히 인공지능(AI)·반도체·배터리·모빌리티·빅데이터·바이오 등 첨단 분야에서 기업 수요에 맞춰 교수와 연구원을 위촉하는 기금교수를 100명 이상 두기로 했다.
지금 우리 대학은 미래에 투자할 재원이 크게 부족하다. 15년째 지속된 등록금 규제로 인해 사립대 공대 등록금이 연 900만 원가량으로 영어유치원만도 못하다. 지난해 출생자가 24만 명 선으로 50여 년 전의 4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학령인구 급감도 심각하다. 서울의 유명 사립대조차 정원 외의 외국인 학생 유치 없이는 유지가 어려울 정도다. 대학·정부출연연구원·기업에 지원하는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도 내년에 두 자릿수나 감소할 예정이다. 다만 유치원·초중고에 투입하는 교육재정교부금 중 올해부터 3년간 대학에 연 1조 5000억 원가량을 돌릴 수 있게 됐으나 갈 길이 멀다.
인재양성과 R&D에 나서는 대학의 경쟁력이 떨어지면 미래 성장 동력이 약화된다. 가뜩이나 우리는 올해 1%대 초저성장세로 ‘잃어버린 30년’에 시달린 일본보다도 못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이 재정 위기를 해소하려면 기업에 기술을 이전하고 교원 창업을 활성화해 자체 수익을 확대하거나 기부를 많이 받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연간 총 1000억 원대 초반에 그치는 국내 대학의 전체 기술이전료 수입도 연구자와 나눈 뒤 특허 출원·유지·등록 비용까지 대면 사실상 마이너스이다. 교원 창업이 늘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SCI 논문 위주의 평가로 인해 활성화가 요원하다. 더욱이 대학 기부금이 점차 증가하고 있으나 척박한 기부 문화는 개선될 조짐이 없다. 지난해 학교를 그만둔 한 사립대 교수 중에는 애초 임용 전 창업했던 회사를 지난해 말 무려 2조 원 대에 사모투자펀드에 매각했으나 아직 기부하지 않은 사례도 있다. 기부 문화가 발달하고 세제혜택이 많아 조 원 단위 기부가 심심찮게 일어나는 미국과는 대조적이다.
이 시점에 중견·중소기업 오너가 대학 기부를 많이 할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을 꾀할 필요가 있다. 기업인들은 가업 승계 시 50%나 되는 높은 상속세(대기업은 60%)로 인해 경영권 단절을 우려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상속세가 없는 싱가포르로 회사를 옮기려는 이도 나올 정도다. 기업인들이 상속 주식을 대학에 신탁할 경우 피상속인의 경영권을 유지시켜 주되 학교는 그 배당금을 R&D 등에 쓰면 대학과 기업의 상생이 이뤄질 수 있다. 만약 그 기업이 20년쯤 생존한다면 신탁 주식을 피상속인에게 돌려주는 것도 한 방법이다. 기업인의 사기는 높이고 대학의 재정은 확충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은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는 문제의식이나 비전·전략이 부족하고 기획재정부는 세수 확보에만 신경을 쓰고 대학은 혁신 생태계보다 현상 유지 경향이 강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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