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국이 태생적으로 자국 통화로 대외자본을 조달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진다는 ‘원죄(original sin) 가설’을 반박하는 논문이 나왔다. 자본시장 규모가 커지고 물가 안정으로 중앙은행의 신뢰성만 확보되면 신흥국도 충분히 자국 통화로 대외자본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14일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소속 한바다 과장은 오태희·이장연 인천대 교수와 함께 작성한 ‘신흥국 원죄의 소멸 원인에 대한 실증 연구’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원죄 가설은 배리 아이컨그린 UC버클리대 교수와 리카르도 하우스만 하버드대 교수가 동아시아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에 제시한 개념이다. 신흥국은 아무리 노력해도 해외에서 자국 통화로 자본을 조달할 수 없는 구조적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는 이론으로 학계뿐 아니라 정책 당국에도 큰 영향을 줬다.
연구진은 이와 같은 원죄 가설이 절대적이지 않다고 반박했다. 2005~2019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동유럽·중남미 등 21개국의 국가 간 패널 회귀분석 결과 국채를 중심으로 한 신흥국 채권시장의 발달이 선진국이 신흥국 통화표시 채권 투자를 늘린 주요 요인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공공 부문 채권시장 규모와 외국인이 보유한 신흥국 통화표시 채권 잔액은 양의 관계로 분석됐다. 신흥국 채권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유동성이 개선되자 투자 매력도가 높아진 결과다.
한 과장은 “물건을 살 의사는 있었는데 채권시장이 없거나 규모가 작아서 못 샀던 것”이라며 “채권시장 규모를 키우는 것은 신흥국이 자체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원죄 가설에 반한다”고 설명했다.
또 실증분석 결과 실제 물가가 물가 목표치에 근접할수록 해외투자가들이 더 많은 신흥국 통화표시 채권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흥국 채권을 보유한 해외투자가들은 해당 국가의 통화 가치 변동에 민감해 중앙은행 신뢰성을 중시하는데 물가 안정을 통화 당국 평가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한 과장은 “자본시장 육성을 통해 유동성을 높이고 물가 안정을 통해 중앙은행 신뢰성을 확보하면 신흥국도 충분히 자국 통화로 대외자본을 조달해 원죄 가설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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