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이후 헌혈이 급감하면서 전국 병원에서 면역글로불린이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이에 따라 면역글로불린을 꼭 필요로 하는 가와사키병 소아 환자, 면역 결핍 환자 등의 치료에 비상에 걸렸다. 약국가는 독감과 코로나19의 동시 유행으로 감기약이 다시 부족하게 되지는 않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면역글로불린 품귀의 경우 헌혈 인센티브 제도 도입이, 되풀이되는 의약품 부족 사태는 약가제도 개선과 원료의약품의 자급률 제고가 해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9일 의료계에 따르면 대다수의 아동병원이 면역글로불린 재고가 이미 바닥났거나 거의 바닥날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중증 환자들이 많은 서울대병원조차 최근 물량이 바닥나기 직전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재고량을 늘렸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면역글로불린이 곧 동이 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게 서울대병원 측 설명이다.
암 환자와 환자 보호자 등이 활동하는 인터넷 카페에는 내원하는 병원의 의사로부터 제약사가 면역글로불린을 생산하지 않아 처방을 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시험관 아기 시술 과정에서 물량이 없어 면역글로불린 주사를 맞지 못했다는 하소연도 곳곳에서 올라온다. A 병원은 교수가 직접 제약사에 사정해서 면역글로불린을 확보했으니 A 병원으로 가보라는 권유의 글도 눈에 띈다.
면역글로불린은 항원의 자극에 의해 면역반응으로 만들어지는 당단백질 분자로 혈액 내에서 특정한 항원과 결합해 항원-항체 반응을 일으킨다. 자가면역질환을 치료하는 효과가 탁월해 자가면역 뇌염과 이식 환자의 거부 반응, 길랭-바레 증후군 치료 등에 사용된다.
가와사키병 소아 환자, 면역 결핍 환자 등에게는 필수의약품인 면역글로불린이 이처럼 품귀 현상을 빚고 있는 것은 코로나19 발생 등의 요인으로 헌혈이 크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면역글로불린, 알부민 등을 제조하는 데는 혈장장분획제제용 혈장이 쓰이는데 국내 공급량은 2016년 56만 8040ℓ로 2022년 47만 4103ℓ로 줄고 있는 추세다. 부족한 혈장은 미국 등 해외에서 수입하는데 문제는 코로나19로 가격이 뛰고 있다는 점이다. 2018년 ℓ당 13만 1000원이었던 미국산 혈장 가격은 지난해 19만 1000원으로 오른데 이어 올해는 20만 원 이상으로 책정됐다.
해외 시장에서의 비싼 면역글로불린 가격도 국내 수급 상황을 어렵게 하고 있다. 국내 면역글로불린 가격은 50mℓ(5%), 200mℓ(10%) 제품이 각각 6만 원대, 42만 원대이지만 외국에서는 이보다 5배 이상의 가격이 형성돼 있다는 게 의약계의 전언이다. 제약사 입장에서는 수출에 역점을 둘 수 밖에 없고 수출 물량만큼 국내 면역글로불린은 더 부족하게 된다.
정부와 여당은 해법 중 하나로 헌혈 활성화에 힘을 쏟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면역글로불린 공급가 인상, 혈장 공급망 추가 확보 등을 놓고 유관 부처와 논의를 진행 중이다.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헌혈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코로나19가 확산돼 혈액 관리가 위기에 처했다”며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헌혈 기부 문화 조성을 위해 헌혈자를 위한 예우 증진 사업을 펼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 의원이 2020년 발의한 헌혈자 예우를 위한 혈액관리법 개정안은 2021년 본회의를 통과했다. 지난해에는 의사 승인시 70세 이상도 헌혈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발의했다.
조제용 아세트아미노펜, 변비약 등 의약품 수급 불안정과 관련해서는 약가제 개선과 원료 의약품 자급률 제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사용량-약가연동, 실거래가 제도 등 약가를 깎는 정책은 많은데 가격을 제대로 쳐주기 위한 제도는 거의 없다”며 “우리나라는 원료 의약품을 기술이 없어 못 만드는 게 아니라 가격이 너무 낮아 수지타산이 안 맞아 안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중국·인도산 원료 의약품 가격이 뛰면 그 원료를 사용하는 국내 의약품 공급은 달릴 수 밖에 없는 구조"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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