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엔 환율이 한 달 만에 다시 800원대로 내려앉았다. 일본은행(BOJ)의 깜짝 정책 수정으로 일시적인 엔화 강세가 나타났으나 추가적인 긴축이 어렵다는 시장 반응이 나오면서 엔화 가치가 약세로 전환한 것이다. 다만 엔화 가치가 저점을 지났다는 평가가 나오는 만큼 앞으로 800원대 원·엔 환율을 볼 기회가 많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7월 31일 하나은행이 고시하는 원·엔 재정환율은 외환시장 마감 시간인 오후 3시 30분 기준 899.7원으로 전 거래일보다 16.73원이나 급락했다. 지난달 5일 마감 가격 기준 100엔당 897.29원을 기록한 지 약 한 달 만이다. 그보다 이전에 800원대로 진입한 것은 2015년 6월 27일(897.91원)로 원화 대비 엔화 가치는 8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떨어진 상태다.
엔화 가치가 출렁이는 것은 지난달 27~28일 일본은행의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예상치 못한 결정이 나왔기 때문이다. 일본은행은 통화정책수단인 수익률곡선관리(YCC·Yield Curve Control) 정책을 일부 수정해 유연하게 운영하기로 했다. 단기 정책금리를 -0.1%, 장기금리인 국고채 10년물 금리를 0% 정도로 지속 유지하되 이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0.5%로 매 영업일 실시했던 지정가격 오퍼레이션 이율을 1.0%로 높이겠다고 한 것이다. 변동 폭도 ‘±0.5% 정도’를 ‘목표’로 하기로 하면서 조금 더 유연성을 부여했다. 일본 10년물 국채금리가 상단인 0.5%를 넘어도 즉각적으로 국채를 매입하기보다는 1%까지는 보겠다는 의미다.
일본은행 통화정책인 YCC는 단기정책금리에 -0.1%를 적용하고 장기금리인 10년물 국채금리를 0% 정도로 해 수익률 곡선이 우상향하도록 시장금리가 이보다 높아질 때마다 상한 없이 필요한 규모의 장기 국채를 매입하는 방식이다. 단기금리를 더 낮출 수 없기 때문에 장기금리인 10년물 국채금리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마저도 공개시장이 아닌 일본은행이 특정금리를 지정한 뒤 무제한 매입(지정가격 오퍼레이션)하고 있다. 디플레이션에 시달리는 일본이 물가 수준을 2%로 끌어올리려는 정책이다.
일본은행이 정책 수정에 나선 것은 지난해 12월 이후 7개월 만이다. 지난해 12월엔 장기금리 변동 폭을 ±0.25% 정도에서 ±0.50% 정도로 확대하고, 지정가격 오퍼레이션 금리도 0.25%에서 0.50%로 올렸다. 당시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깜짝 결정으로 시장은 크게 반응했다. 일본은행이 사실상 금리를 인상한 것으로 인식하면서 장기금리가 크게 오르고 엔화 가치도 절상됐다.
이번에도 일본은행이 예상 밖 결정을 내리면서 긴축 전환했다는 분석이 제기되기도 했다. 매파적(통화긴축선호) 평가에 엔·달러 환율은 28일 오전 2시 141.09엔에서 오후 4시 138.78엔으로 하락했다. 다만 이번 결정이 완화 정책을 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YCC가 시장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하기 위한 시장 기능 유지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도 기자회견에서 YCC 운용 유연화를 두고 완화적 통화정책을 종료하는 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향후 경제·물가 정세에서 상방 리스크가 현실화될 경우 장기금리가 0.5%를 상회할 여지를 마련해 YCC 지속성을 높임으로써 2% 목표에 도달 가능한 확률을 높이기 위한 조치”라며 “장래 불확실성을 재차 인식한 상황에서 리스크가 현실화된 후 대응하면 부작용이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일본은행의 물가 전망에 주목하면서 통화정책 정상화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해석에 힘이 실리면서 엔화는 다시 약세로 돌아섰다. 일본은행은 소비자물가가 2023년엔 2%를 넘었어도 2024~2025년이 되면 다시 2%를 밑돌 것이라고 봤다. 지난달 31일엔 일본 10년물 국채 수익률이 0.607%로 2014년 6월 이후 9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으로 치솟으면서 일본은행은 공개시장 조작에 나섰고 이로 인해 엔화 가치는 달러당 142엔까지 떨어진 상태다.
다만 YCC 정책 조정 이후 당분간 추가적인 정책 조정이 이뤄지지 않더라도 엔화가 워낙 저평가를 받고 있는 만큼 엔·달러 환율은 점차 하향세를 보일 것이란 분석들이 나오고 있다. 엔화가 점차 강세로 전환한다면 원화 가치가 더 큰 강세를 보이지 않는 이상 원·엔 환율은 오를 수밖에 없다.
이다은 대신증권 연구원은 “엔·달러 환율이 단기적으로 변동성이 낮을 수 있으나 엔화 재평가가 다시 시작되는 구간”이라며 “이번 일본은행 행보가 충분히 긴축적이지 못했더라도 시장금리가 상승해 과거보다 긴축적인 환경이기 때문에 엔화가 다시 약해지긴 어렵다”고 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연구원도 “일본은행의 통화정책 기조 전환 신호가 당장 일본 경제 펀더멘탈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금융시장엔 적지 않은 영향을 유발할 수 있다”며 “무엇보다 엔화 초약세 현상의 종료 또는 엔화 추가 강세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국제금융센터 역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b·연준)와 일본은행의 통화정책 불확실성으로 변동성 국면이 이어지겠으나 연말로 갈수록 엔화 강세 압력이 커질 것으로 평가했다. 해외 투자은행(IB)의 엔·달러 환율 예상 경로는 올해 9월 말 137엔, 12월 말 133엔, 내년 3월 말 130엔, 6월 말 126엔 등으로 분기마다 2~3%씩 강세를 보인다는 전망이다. 신한투자증권도 올해 3분기와 4분기 엔·달러 환율 전망을 평균 138엔, 130엔으로 하향 조정(엔화 강세)했다.
이상원 국제금융센터 부전문위원은 “미국과 일본의 통화정책 차별화가 축소될 것이라는 기대가 가시화하면서 엔화 강세 압력이 강화될 전망”이라며 “일본 경상수지 흑자가 직접투자에 의한 자금 순유출을 상쇄할 정도로 확대될 경우 엔화의 대외충격에 대한 회복력을 높이면서 강세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8년 만에 돌아온 엔저에 일본여행 수요마저 급증하면서 미리 엔화를 바꿔두려는 움직임은 이미 활발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월 중 거주자 외화예금에서 엔화 예금 잔액은 74억 8000만 달러로 한 달 만에 12억 3000만 달러 급증했다. 월간 기준 역대 최대 증가 폭이다. 잔액 기준으로도 통계가 제공된 2012년 6월 이후 사상 최대 규모다. 한은은 엔화 환전 수요와 여행 후 남은 엔화를 예금으로 보관하는 개인 여유 자금, 일본 증시 호황에 따른 투자자 예탁금 예치 등으로 엔화 예금이 늘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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