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겋게 물든 눈, 웃어도 순간순간 맺히는 이슬. 울먹이는 목소리 저편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가슴에 묻은 지 1년 6개월이 흘렀지만 소중하고 행복했던 순간이 남아 있는 듯했다.
2021년 10월 뇌사 상태에 빠진 딸 소율이의 장기를 기증했던 아빠 전기섭 씨(45). 서울 증산동 카페에서 만난 그의 모습은 초췌함 그 자체였다. 놀이터를 너무 좋아했고 항상 분홍색만 찾던 천사 같은 딸에게 닥친 지옥 같았던 시간의 기억도 생생한 것처럼 보였다. 순간의 방심이었다. 소율이가 좋아하는 키즈 카페 목욕 시설에서 놀리려고 데리고 갔는데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물에 빠져 심정지를 일으켰다. 바로 병원에 갔지만 의식불명에 빠졌다. 그 사이 또 한 번의 심정지가 왔다. “처음에는 뇌가 10% 정도 기능했지만 두 번째 심정지가 온 뒤로는 5% 미만으로 떨어졌죠. 살아 있지만 살아 있는 게 아니었어요. 장기 기증 관련 코디네이터들이 와서 뇌사와 장기 기증에 대해 설명을 해주더군요.”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했던가. 폐암을 앓던 소율이 엄마는 사고 직후 상태가 더 악화돼 먼저 세상을 떴다. 두 번 무너진 하늘. 전 씨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시간들이었다.
딸의 심장과 신장 기증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데, 혹시 깨어날지도 모르는데 딸의 몸에 칼을 댈 수 있을까. 부모의 반대도 심했다. 어떻게 애를 두 번 죽일 수 있냐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장기 기증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욕심에 소율이가 더 힘들어 할 수 있다는 생각과 이러다가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전 씨는 “어느 날 갑자기 숨을 거두면 정말 나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는 것 아니냐. 그럴 바에는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판단했다”며 “심장을 기증 받은 아이가 살 수 있다면 소율이도 같이 사는 것 아니겠냐”고 기증 이유를 설명했다.
소율이의 심장을 기증한 바로 그날 아빠는 팔에 문신을 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딸의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소율이의 환하게 웃는 모습과 함께 남겨진 문구들. ‘소율아♥ 아빠가 너무 사랑해’ ‘소율 ♥ 아빠 딸’….
딸이 떠난 후 한동안 술에 절어 지냈다. 소율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 놀이터, 어린이들이 나오는 프로그램 등을 볼 때마다 견딜 수 없는 그리움과 아픔이 찾아왔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다가 사람이 망가질 것 같았고 이런 모습을 소율이가 보면 뭐라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이제는 일에만 집중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한다”고 덧붙였다.
한 가지 위안이 되는 점은 심장을 기증 받은 아이의 가족과 약간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장기조직기증원의 ‘희망 우체통’을 통해 서신을 두 번가량 받았다고 한다. 소율이의 심장을 받은 아이가 건강하게 크고 있다는 얘기를 전할 때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기도 했다. 전 씨는 “그 아이가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느낀 것은 아직 소율이의 심장이 뛰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며 “그것 자체만으로도 큰 위안을 받는 느낌”이라고 전했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기증 받은 아이를 만나 건강하게 지내고 있는지, 심장은 잘 뛰고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직접 접촉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잘 지내겠지 기대만 할 뿐이다. 그는 “그 아이의 몸속에서 뛰고 있는 소율이의 심장 소리를 너무 듣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라며 “언젠가 아이를 직접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전 씨는 매달 네 번째 주말 경기도 분당을 찾는다. 저세상에서 함께 지낼 소율이와 아내를 보기 위함이다. 손에는 언제나 분홍색 꽃이 들려 있다. 대화는 언제나 자책이다. 옆에 있을 때 더 잘할 것을, 소중한 것을 모르고 같이 많이 지내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못다 한 말을 꺼낸다. “소율아, 미안하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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