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중국 배터리 기업이 전구체와 리튬 등 핵심 광물을 조달할 목적으로 국내외에 합작법인을 세우거나 공동 투자한 프로젝트가 10곳 이상인 것으로 파악됐다. 배터리의 광물 규정이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전기차 보조금 적용 여부를 결정 짓는 핵심 열쇠로 떠오르면서 ‘차이나 익스포저’가 K배터리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산 배터리 소재 사용은 당장 전기차 보조금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국 정부가 17일(현지 시간) 공개한 IRA 보조금 적용 대상 전기 차종이 40종에서 16종으로 급감한 것이다. 현대차·기아가 IRA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앨라배마 공장에서 생산한 제네시스 GV70 전기차도 배터리 셀을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이유로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됐다.
19일 서울경제신문이 국내 주요 배터리 셀·소재 기업들의 광물 공급망을 분석한 결과 중국의 광물 제련 기업들과 합작사를 설립했거나 공동 투자한 프로젝트가 현재까지 10곳으로 확인됐다.
LG에너지솔루션(373220)은 중국의 화유코발트와 배터리 재활용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했고, 리튬 화합물 제조 업체 야화와는 모로코에서의 수산화리튬 생산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 LG엔솔은 인도네시아에서도 국영기업과 배터리 생산을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데 컨소시엄에 중국 화유코발트가 참여하고 있다.
SK온·에코프로(086520)는 중국의 폐배터리 처리 업체인 거린메이(GEM), LG화학(051910)은 화유코발트와 새만금단지에 전구체 합작 생산 공장을 짓는다. LG화학은 화유코발트의 자회사인 B&M과 합작사를 설립, 경북 구미에 연산 6만톤 규모의 양극재 생산시설을 구축한다.
에코프로는 인도네시아에서 GEM과 니켈중간재(MHP) 합작 생산 시설을, 포스코홀딩스는 화유코발트와 폐배터리 재활용 합작법인인 HY클린메탈을 광양에 설립했다. 양극재 기업인 엘앤에프도 중국 시노리튬머티리얼즈와 대구에 수만톤 규모의 수산화리튬 합작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국내 1위 전해질 업체인 엔켐(348370)도 중국 비야디의 자회사인 DFD와 국내에 리튬염 합작공장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프로젝트까지 감안하면 한중 기업 간 협력 사례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천수답처럼 미국의 지침만 기다려서는 고객사의 요구를 맞출 수 없다”면서 “한중 협력은 불가피하다”고 토로했다.
부가가치 큰 양극재·전구체 생산시설 장악…K 배터리, IRA 광물규정 충족
국내 배터리 셀사와 소재 회사들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의 배터리 핵심 광물 규정을 충족하기 위해 가공 과정에서 부가가치가 올라가는 전구체와 양극재 생산 공장을 국내에 짓는 전략을 펴왔다. 중국과 같은 비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에서 광물을 조달해도 FTA 체결국인 한국에서 50% 이상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면 IRA의 보조금 적용 대상으로 인정해주는 조건을 활용한 것이다.
‘배터리의 심장’으로 불리는 양극재는 배터리 원가의 40%를 차지한다. 양극재의 중간 소재인 전구체는 양극재 원가의 60~70%를 차지한다. 지난달 말 공개된 IRA 배터리 세부 지침에서 양극재와 음극재가 사실상 광물로 분류되면서 K배터리사는 한숨을 돌렸다. 배터리 생산의 밸류체인에서 양극재와 음극재의 생산을 장악하면 적어도 배터리 광물 규정 때문에 IRA의 전기차 보조금을 못 받는 상황은 사라진다고 판단해서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도 “IRA 세부 지침에서 양극재와 음극재가 부품으로 정의되지 않으면서 우리 업체들이 광물 비율을 충족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차이나 익스포저’ 큰 K 배터리…美 ‘해외우려단체’ 범위 촉각
문제는 미국이 앞으로 공개할 해외우려단체(FEOC)의 범위다. 미국은 FEOC로부터 조달한 배터리 부품은 2024년부터, 핵심 광물은 2025년부터 보조금 대상에서 뺀다. FOEC에 중국 기업 또는 한중 합작법인이 포함되면 보조금을 받지 못해 ‘차이나 익스포저’가 K배터리에는 큰 짐이 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에 따라 지금까지 쌓아온 배터리 밸류체인을 통째로 뒤흔들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미국 정부가 FEOC에 중국 기업을 상당수 포함시키거나 한중 조인트벤처(JV)를 걸고 넘어질 경우가 대표적이다.
미국은 지난해 말 발표한 IRA 백서에서 중국·러시아·이란 등을 FEOC로 지정했지만 구체적인 적용 범위는 아직 공개하지 않았다. 미국이 반도체법처럼 중국이 25%의 직·간접적 의결권만 갖고 있더라도 해당 기업을 FEOC로 분류할 경우 국내 기업에 큰 타격이 예상된다. 신정훈 김앤장법률사무소 외국 변호사는 “FEOC의 범위와 규제 강도가 어떻게 나올지 업계도, 정부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다만 IRA가 배터리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는 데 있다고 보면 최악의 상황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폭증하는 배터리 수요…中 기업과 협력은 어쩔수 없는 선택
배터리 업계도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 문제는 폭증하는 글로벌 전기차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국 기업과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안정적으로 광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이 중국 기업이기 때문이다. 언제 나올지 모를 FEOC의 가이드라인만 천수답처럼 바라봐서는 늘어나는 완성차 업체들의 배터리 공급 요구를 맞출 수 없다는 전략적 판단도 작용했다. IRA 시행에도 국내 배터리사들이 중국 기업과 합작 또는 공동투자 형태로 배터리 광물 확보와 소재 생산에 나선 이유이기도 하다.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中 배터리 공급망…美 행정부도 장고
일각에서는 중국 업체들의 광물 및 소재 공급망이 글로벌 배터리사는 물론 완성차 업체들과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 미국도 강한 규제안을 내놓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중국의 배터리 기업인 엔비전AESC는 미국에 전기차 공장을 짓고 있는 독일의 BMW·메르스데스벤츠사에 배터리를 공급할 예정이다. 또다른 중국 배터리 업체인 궈시안은 미국 미시간주에 양극재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중국의 텐치리튬은 칠레의 글로벌 리튬 회사인 SQM의 2대 주주다.
미국 업체들도 중국 배터리 회사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미국의 세계 1위 리튬 업체인 앨버마는 중국에 다수의 생산 공장을 보유하고 있고 CATL은 미국 포드와 기술 합작 방식으로 테네시주에 배터리 합작 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FEOC 발표가 늦어지는 것은 글로벌 배터리 공급망에 거미줄처럼 뻗쳐 있는 중국의 영향력을 발라내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방증이란 분석도 나온다. 미국이 FEOC에서 한중 합작법인과 같은 방식까지 포함시킬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FEOC에 합작법인이 포함돼도 구체적인 지분율에 따라 규제의 강도가 달라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기업을 다수 포함시키더라도 기업 유형에 따라 유예 기간을 둘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반도체법처럼 강한 규제안을 내놓을지, 글로벌 배터리 공급망의 현실을 고려해 좀 더 완화된 형태로 갈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박철완 서정대 스마트자동차과 교수도 “IRA의 본질은 탈중국이 아니라 미국의 배터리 굴기”라면서 “미국은 배터리 후진국이기 때문에 산업 부흥을 위해서는 중국과도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공급망 脫중국 가속화하는 K 배터리…호주·캐나다·미국 눈돌려
K배터리는 중국이 장악한 핵심 광물 공급망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업을 벌이고 있다. 조재필 울산과학기술원(UNIST) 에너지화학공학과 교수도 “미국 정부는 IRA 핵심 광물 요건을 원칙대로 적용하고 FEOC에도 중국 기업 다수를 포함시킬 가능성이 크다”면서 “아직 대비할 시간이 있기 때문에 서둘러 대체 업체를 발굴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에서 전혀 조달하지 않고 니켈을 확보하는 사례도 나오면서 소재 국산화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 LG화학과 고려아연은 합작사 설립 등 협력을 강화하며 독자적인 니켈 밸류체인을 완성했다. 우선 고려아연은 프랑스 원자재 트레이딩 기업 트라피구라와의 협력을 통해 니켈 원광을 조달하고 자회사 켐코가 이를 황산니켈로 제련한다. LG화학과 켐코 합작사인 ‘한국전구체주식회사’는 2024년부터 울산 공장에서 황산니켈을 기반으로 양극재에 들어가는 전구체를 만들 계획이다. 업계 관계자는 “광물 공급부터 제련, 소재 생산까지 탈중국에 성공한 보기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국내 배터리 업계는 미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발맞춰 북미에서 소재 확보에도 힘쓰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과 LG화학은 북미 최대 배터리 재활용 기업인 라이사이클에 2021년 말 600억 원을 투자하며 지분 2.6%를 확보했다. 양사는 10년에 걸쳐 폐배터리에서 추출된 니켈 2만 톤을 구매하는 계약도 체결했다. LG엔솔은 미국 컴파스미네랄과 2025년부터 6년 간 매년 4400톤의 탄산리튬을 공급받는 장기 계약도 맺었다. 또한 캐나다의 아발론, 스노우레이크로부터 각각 5만5000톤, 20만톤씩 수산화리튬을 받기로 했다.
K배터리는 광물 부국인 호주에도 주목하고 있다. 리튬·니켈·코발트 매장량은 세계 2위, 희토류 매장량은 세계 6위 국가다. SK온은 호주 리소스레이크에 지분 10%를 투자했고 2024년부터 최대 10년 간 총 23만톤에 달하는 리튬을 공급받는 계약을 체결했다. 다른 호주 광물회사인 글로벌리튬과도 업무협약(MOU)을 맺었다. LG엔솔은 라이온타운과 리튬정광 70만톤 규모의 공급 계약을 맺었으며 호주 시라로부터 천연흑연을 조달할 계획이다.
민간 분야에서 원·소재 조달처 다변화에 서두르고 있지만 정부의 외교적 지원이 더욱 뒷받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은교 산업연구원 박사는 “한국은 핵심 광물, 소재 공급망 분야에서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아 미국, 유럽연합(EU)의 공급망 제도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핵심 광물 공급망 다변화 전략과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등을 활용한 공급망 협력 및 구축 강화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