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MC가 올해 급격한 정보기술(IT) 시장 둔화에도 공격적인 연구개발(R&D) 정책을 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대만 정부의 든든한 지원 덕분이다. 반도체 공급망이 글로벌 경제의 최대 이슈로 떠오른 지금 대만 외에도 주요국들은 기술 확보에 나선 기업들의 의지를 북돋아줄 수 있는 정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파행과 진영 논리에 얼룩져 반쪽짜리 법안을 만든 한국 정부와는 다른 행보다.
대만 정부는 지난해 11월 자국 반도체 기업의 R&D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을 25%로 상향하는 것을 골자로 한 ‘산업 혁신 조례 수정안’을 발의하면서 기술 패권을 반드시 사수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당시 왕메이화 대만 경제부 장관은 “대만에 지금 세계 정세는 중요한 순간”이라며 “대만은 계속 전진하고 연구개발을 지속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세금 감면으로 인한 긍정적 효과가 세수 감소로 생기는 문제보다 훨씬 클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수년간 일본·미국 등에서 적극적인 투자를 모색하던 TSMC는 이달 12일 지난해 4분기 실적 발표회에서 연간 R&D 비용을 20% 올린다고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TSMC가 대만 정부의 꾸준하고 발 빠른 반도체 지원 정책에 힘입어 세계 반도체 리더 입지를 다져나갈 것이라고 평가한다. 실제 대만 재무부에 따르면 대만 반도체 수출은 2016년 이후 7년 연속으로 늘어나고 있다. 2020년에는 22%, 2021년에는 27.1%, 지난해에는 18.4%로 3년 연속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 손범기 바클레이스 이코노미스트는 “단기적으로 반도체 산업에서 대만을 대체할 나라는 없다”며 “미국 등 다른 국가들이 반도체 칩 생산을 강화하고 있지만 즉각적인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강대국들은 대만 업체와 협업하거나 이들을 따라잡기 위해 파격적인 정책을 내놓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 기업이 시설 투자를 단행하면 25%를 세액공제해주는 ‘반도체과학법’을 지난해 8월 공표했다. 유럽과 일본, 미국과 대치 중인 중국도 수십조 원의 보조금 마련책을 발 빠르게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주요국들의 초당적이고 속도감 있는 정책 결정과 달리 우리나라는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직후 반도체특별법을 제1 입법 과제로 내세우며 파격적인 지원을 수차례 공언했다. 당내에 반도체특별위원회를 만든 국민의힘은 지난해 8월 세액공제율을 20%로 높이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여당안으로 대표 발의했다. 미국·중국 등 강대국과 기술 패권을 놓고 경쟁하려면 과감한 지원이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정부 여당 내에서 광범위하게 형성된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 법안은 이후 4개월 동안 제대로 된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파행을 거듭하다 11월 중순이 돼서야 소위 구성에 합의했다. 하지만 12월 본회의를 앞두고 여야 원내대표 간 협상 테이블에 올라가지 못했다. 여당은 기획재정부의 세수 감소 우려를, 야당은 대기업 특혜를 이유로 협상에 미온적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여야는 지난해 12월 23일 대기업의 국가전략기술 시설 투자 세액공제율을 종전의 6%에서 8%로 올리는 내용의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정부안대로 의결했다. 이는 당초 국민의힘 반도체특위가 제시한 20%(대기업 기준)는 물론 더불어민주당이 주장한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재계는 물론 국민의힘 반도체특위 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국민의힘 반도체특별위원장인 양향자 무소속 의원은 지난해 12월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는 ‘조세특례제한법 개정안’을 부결해달라고 공개적으로 호소하기도 했다.
이에 지난해 12월 30일 윤석열 대통령이 “반도체 등 국가전략산업에 대한 세제 지원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하면서 정부의 입장은 180도 바뀌었다. 윤 대통령이 공제율 추가 확대를 지시한 지 나흘 만에 정부는 새로운 안을 전격 발표했다. 정부안에 따르면 반도체·배터리·백신·디스플레이 등 국가전략기술의 당기(연간) 시설 투자에 대한 세액공제율이 대기업 기준 현재 8%에서 15%로 올라간다. 올해 반도체 생산 시설에 1조 원을 투자한다면 현재 세금 감면액은 800억 원에 그치지만 정부안 기준으로는 1500억 원에 달하게 된다.
다만 이 개정안 역시 국회 문턱을 제때 넘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달 안으로 개정안이 국회로 넘어가더라도 여야가 논의해 수정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국회의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야당의 동의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우리 정부가 다른 나라에 비해 논의와 합의가 상당히 늦은 편”이라며 “여야가 개정안을 하루라도 빨리 통과시켜야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경쟁력을 살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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