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세계 경제의 키워드가 ‘I(inflation·인플레이션)’였다면 내년 키워드는 ‘R(Recession·침체)이 될 것입니다. 물가가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침체가 본격화하면 그게 바로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이죠. 내년 경제 키워드가 ‘S(스태그플레이션)’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게 세계 각국의 가장 큰 과제가 될 겁니다.”
전광우(73·사진)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2일 서울 삼성동 트레이드타워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앞으로 경기 침체가 전 세계적인 화두가 될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특히 “내년 우리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지 않으려면 ‘선택적 재정 확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 이사장은 “재정 운용의 폭이 크지 않은 어려운 상황이지만 에너지 인프라 투자 등에는 재정을 투입해 우리 경제의 성장 동력이 급격히 소진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며 “노동·규제 개혁 등을 통해 탈(脫)중국 자금을 국내로 흡수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우리 경제의 최후 보루로서 재정 건전성을 강조하는 한편 약화되고 있는 경제 성장을 되살리기 위한 재정의 적극적인 역할도 주문한 것이다. 15년간 세계은행 금융 담당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뒤 우리금융그룹 부회장, 딜로이트코리아 회장 등을 거쳐 2008년 초대 금융위원장으로서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주도했고 역대 최장수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타이틀 등도 보유한 전 이사장에게 혼란과 격변의 시기에 우리 경제가 나아갈 방향을 물어봤다.
인터뷰 날 11월 소비자물가가 발표됐다. 전년 동월 대비 5.0% 올라 10월(5.7%)에 비해 떨어졌다. 최근 원·달러 환율도 가파른 하락세다. 때마침 전날에는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12월 금리 인상 속도 조절 가능성도 시사했다. 인플레이션 불안감이 조금 누그러질 만한 분위기지만 전 이사장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과거 경험을 되돌아보면 위기 국면은 불안했던 시장이 안정을 찾다가 다시 악화하는 사이클이 반복된다”며 “실제로 2008년 10월 한미 통화 스와프 체결로 외환시장의 불안이 잦아드는 듯했지만 이듬해 3월 원·달러 환율이 1570원을 넘어섰다”고 회상했다. 이어 “최근 위기의 원인인 코로나19 이후 과도하게 풀린 유동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같은 지정학적 긴장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고 그 여파가 금융뿐 아니라 실물 부문까지 퍼지고 있어 안심하기는 이르다”고 설명했다.
전 이사장은 내년 경제를 흔들 요인으로 고물가 외에도 중국의 경제 둔화와 북한의 도발, 전쟁 장기화 등 지정학적 리스크를 꼽았다. 그는 특히 “개인적으로 중국이 가장 큰 리스크 요인이라고 몇 년 전부터 말해왔다“며 “세계은행에서 일하며 개혁 초기 중국, 고도 성장기의 중국을 모두 지켜봤다. 이제는 중국이 성장 모멘텀이 떨어지는 변곡점을 지나고 있음을 강하게 느낀다”고 했다. 전 이사장은 “중국은 우리 수출의 4분의 1, 홍콩까지 합치면 30%에 이른다”며 “우리로서는 (무역정책 등의) 전략적 수정이 필요하고, 나아가 중국 리스크가 커지고 있는 만큼 경제와 안보가 분리되는 게 아니라 같이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중국에 대해 “부자가 되기 전에 고령화 문제를 안은 현대 사회의 최초 국가가 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무엇보다 고령화 문제와 맞물려 중국 지방정부의 심각한 부채, 이미 터지고 있는 부동산 버블 등은 모두 수습이 쉽지 않은 문제들이다. 전 이사장은 “시진핑 3연임 이후 지도부 구성 자체가 반시장·반기업적인 당 중심의 사람들로 채워져 소위 국가자본주의로 유턴하고 있다”며 “중국도 고도 성장이 저물고 저성장이 고착될 수 있는 만큼 우리 경제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머리를 짜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맥락에서 비생산적 정쟁을 이어가는 정치권이 국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리스크라고 꼬집었다. 전 이사장은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정부가 위기 극복을 위해 정책 대응에 속도감 있게 나설 수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여소야대 지형으로 정부의 국정 동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정부가 컨트롤할 수 없는 대외 위험 요인이 가득한데 내부적으로도 위기 극복을 위한 협조 체계가 구축되지 않는 상황”이라며 “말로 옮기기도 부끄러운 이슈에 대한 불필요한 정쟁을 멈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화물연대 파업을 부추기는 듯한 야당의 움직임도 비판했다. 전 이사장은 “국익 앞에서는 정쟁을 멈추고 똘똘 뭉치는 미국을 배워야 한다”며 미국 상원이 찬성 85표 대 반대 15표로 철도파업금지법을 통과시킨 점을 언급했다. 현재 미 상원이 공화당 50석, 민주당 48석, 무소속 2석으로 구성된 점을 고려하면 초당적 협력으로 법안이 통과된 것이라는 설명도 뒤따랐다. 그는 “노조들이 걸핏하면 띠 두르고 삭발하고 나서면 어느 해외투자가가 장기적으로 투자할 수 있겠느냐”며 “국익을 위해 야당도 협조할 것은 협조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전 이사장은 그러면서 “대통령도 ‘야전사령관’으로서 경제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에서 통제하기 힘든 여러 대외 요인이 얽혀 현재 위기가 촉발된 것은 맞다”면서도 “하지만 위기의 근원을 외부로만 돌리고 마는 모습을 어느 국민이 원하겠느냐. 대통령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같이 뛰며 정책 집행에 속도를 내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제언했다.
국내외 기관에서 내년 한국 경제가 1%대 성장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고 심지어 노무라증권은 -0.7%의 역성장을 점쳤다. 전 이사장은 “반도체 등 주력 산업의 약화가 굉장히 우려되는 상황”이라면서 “선택적 재정 확대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정부가) 채워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중에서도 재생에너지 전환의 연착륙을 위한 인프라 투자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 이사장은 “현 정부의 건전재정 기조는 옳은 방향이지만 내년 성장 둔화의 폭을 줄이기 위해서는 재정 투자도 필요하다”며 “탄소 중립 시대에 대비하기 위한 에너지 인프라 구축은 정부가 적극 나설 수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삼성전자도 SK도 RE100을 선언하지 않았느냐”며 “재생에너지 인프라 구축은 국가뿐 아니라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RE100은 2050년까지 기업이 사용하는 모든 전력을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로 조달하겠다는 약속이다.
아울러 중국의 정치·경제적 불안으로 글로벌 자본이 ‘차이나 런’을 본격화하는 가운데 이를 국내로 끌어들이는 정책도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해외투자가를 더 적극적으로 유치할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며 “법인세를 글로벌스탠더드에 맞추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말했다. 한국은 법인세 최고세율이 27.5%(지방세 포함)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23.1%)보다 높고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4단계 누진세율이라는 복잡한 과세 체계를 가지고 있다. 전 이사장은 “법 정비를 통해 노동 유연성을 높이는 등 경영의 불안정을 최소화해 한국의 투자 매력을 높여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 사태를 언급하면서 “(트러스 총리가 제안한) 법인세 인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정책의 타이밍, 정책의 조합이 중요하다는 게 영국 사태의 교훈”이라며 “우리의 과도한 법인세율은 지금이라도 글로벌스탠더드에 맞추는 게 맞다”고 짚었다.
그는 이 같은 전반적인 개혁이 글로벌 공급망 개편 흐름의 와중에 국가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묘수라고 강조했다. 전 이사장은 “미국은 여러 인센티브를 주며 해외 기업을 유치하고 자국 중심으로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다”며 “우리 기업도 결국 생존을 위해 미국 투자를 늘리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이어 “법인세 인하, 노동 개혁 등 국내 투자 환경을 개선하는 대폭적인 변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우리 기업마저 ‘탈한국’을 가속화할 수밖에 없다”며 “이는 결국 한국 산업의 공동화로 이어져 고용시장의 활력이 떨어지고 미래 세대의 부담은 더 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He is…
△1949년 서울 △1973년 서울대 경제학 학사 △1977년 미국 인디애나대 경제학 석사 △1981년 미 인디애나대 경영학 박사 △1982~1986년 미국 미시간주립대 경영학 교수 △1986~2000년 세계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 △2000~2001년 국제금융센터 원장 △2001~2004년 우리금융그룹 부회장 △2004~2008년 딜로이트코리아 회장 △2007~2008년 외교통상부 국제금융대사 △2008~2009년 금융위원장 △2009~2013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2013~2018년 연세대 경제대학원 석좌교수 △2019년~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사진=오승현 기자 story@sedaily.com, 정리=곽윤아 기자 or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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