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주요국들이 자국의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해 전기차 보조금 제도를 전면 개편하거나 전기차 보급 속도 조절에 나서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이나 자유무역협정(FTA) 정신은 아랑곳없이 노골적으로 자국 산업 밀어주기를 강행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과정에서 자유무역의 정신이 쇠퇴하고 보호무역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데다 친환경 정책마저 자국 산업 육성을 위한 무기로 변질되고 있는 만큼 우리도 이런 추세에 맞춰 친환경차 보급 및 전기차 보조금 제도를 전면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은 본토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배터리의 핵심 자재를 공급받고 북미에서 조립된 전기차에만 보조금(7500달러)을 지급하는 인플레이션감축법을 통과시켰다. 사실상 중국산 전기차와 배터리를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지만 정작 가장 큰 피해는 우리 기업이 입을 판이다. 실제 미국이 보조금 지급 대상으로 적시한 차종에는 현대차그룹을 포함해 한국산 차는 단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정부는 현대차그룹이 미국 조지아에 새 전기차 공장을 짓고 있는 만큼 보조금 지급 대상 제외 조치를 유예해야 한다고 미국측에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중국은 더 노골적이다. 자국 정부가 장려하는 배터리 교환 서비스(BaaS) 탑재 차량과 자국 기업이 주로 생산하는 주행거리 연장형 전기차(EREV)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도 전기차 보조금 지급을 축소 내지 폐지하고 있다. 영국은 최근 2011년부터 시행해온 전기차 보조금 지급을 종료했다. 5000만 원 이하 전기차를 구매할 때 최대 240만 원을 주던 보조금을 없앤 것이다. 자동차 강국인 독일도 2023년부터 보조금 지원을 단계적으로 줄이는 삭감안을 발표했다. 향후 2년간 배정된 34억 유로의 보조금 예산이 소진되면 지급을 중단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기업이 구매하는 전기차에 대해서는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고 플러그인하이브리드(PHEV) 차량에 대한 보조금을 내년부터 삭감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유럽의 이런 움직임은 경제안보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빠른 전기차 보급이 배터리 원재료에 대한 중국 의존도만 높이고 자국 산업의 공동화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카를루스 타바르스 스텔란티스 최고경영자(CEO)는 “2025년부터 배터리 공급이 부족해져 아시아에 대한 의존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일본도 재난 발생 시 비상 전력을 공급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외부 전력 공급 기능이 탑재된 전기차에 보조금을 추가 지급하는 방식으로 자국 전기차를 우대하고 있다.
반면 우리는 전기차 보급 목표에만 몰두한 나머지 외국산 전기차의 배만 불리고 있다. 실제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 테슬라가 전기차 보조금의 대부분을 쓸어가 정작 국산 전기차 구매자가 받아야 할 보조금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올해 하반기부터 각 수입 브랜드들이 전가형 전기차를 대거 출시하는 만큼 보조금이 외국산에 뿌려지는 금액은 더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
또 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올 상반기 중국산 전기 상용차(버스·화물차 등)는 국내에서 1351대가 팔려 지난해 같은 기간(159대)보다 749% 급증했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중국산 상용차가 보조금까지 받아 국내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승용 전기차 부문도 중국산의 공습에 노출돼 있다. 중국 비야디(BYD)는 내년부터 승용 전기차를 국내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급격하게 오른 원자재 가격으로 국산 전기차는 보조금 지급 기준(5500만 원 이하 100%, 8500만 원 이하 50%)을 맞추기 어려운 반면 저가 배터리를 탑재한 중국산은 기준 충족이 상대적으로 쉽다.
이런 보조금 정책은 국산 수소버스 보급마저 위축시키고 있다. 상대적으로 비싼 수소버스에 대한 보조금이 많은데 이것이 오히려 수소버스 보급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지자체중 단 3곳만이 수소버스 구매보조금에 대한 민간 공모를 진행해 총 23대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했다. 반면 전기버스는 40곳의 지자체가 공모를 실시해 1249대에 대해 보조금이 지급됐다. 대부분의 지자체가 전기버스를 위주로 보조금 신청을 받아 세금을 지출한 것이다.앞서 2020년에도 수소버스는 단 2곳의 지자체가 공모를 받아 19대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한 반면, 전기버스는 24곳의 지자체가 488대에 지급했다.
이처럼 지자체가 수소버스를 외면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수소버스에 대한 보조금 규모가 전기버스보다 2배 가까이 크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현재 수소버스에 대한 기본보조금은 3억원이며, 지자체가 이 중 절반인 1억5000만원을 부담한다. 전기버스의 경우 보조금이 1억6000만원이며 지자체 부담은 8000만원으로 수소버스의 절반에 불과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재정상황이 열악한 지자체 입장에서는 보조금 부담이 절반에 불과한 전기버스를 선호활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수소 충전 문제에다 지방 재정 부담도 수소버스가 더 크다보니 지자체 입장에서는 수소버스를 꺼릴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지자체의 전기버스 선호 현상으로 인해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닌 국산 수소버스 보급은 더딘 반면 중국산 전기버스는 반사이익을 보는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지자체들이 친환경 버스 도입을 늘리면서 국내 전기버스 도입 대수는 2019년 550대, 2020년 1013대, 2021년 1271대 등으로 급증했고, 이 가운데 중국산 전기버스 비중은 2019년 26%, 2020년 34%, 2021년 37.5%로 급상승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전체 896대의 전기버스가 도입됐으며 이 가운데 중국산 비중은 42.3%로 절반에 육박했다. 지난해 중국산 전기버스에 지급된 보조금은 650여억원에 달하며 올해에는 1000억원이 훌쩍 넘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전기차 보조금 정책을 친환경차 보급 중심에서 국내산 우대 쪽으로 대폭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기차 보조금 지급 기준을 우리 기업에 유리하게 재편하고 수소버스 보조금에 대한 지자체 부담을 대폭 낮추는 대신 국비부담을 늘려 전기버스보다 수소버스를 선호하도록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친환경차 보조금 정책의 주무부처가 환경부인 것부터가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환경부는 부처 특성상 환경정책에만 몰두할 뿐 국내 산업 보호에는 소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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