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스라엘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풍토죠. 중국도 기업가 정신을 많이 갖추고 있고요. 이에 비해 한국은 매우 뛰어난 과학기술과 연구개발(R&D), 엔지니어링 역량을 갖고 있지만 유행을 좇는 연구 포퓰리즘에 빠져 있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태계 미국인인 조슈아 잭맨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14일 서울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상대적으로 논문·특허·기술이전 등 양적인 성과에 집중하고 어려운 분야에 도전하는 기업가 정신이나 기술 사업화 시스템이 부족한 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한국은 경제·문화적으로도 선진국이지만 과학기술과 엔지니어링 수준이 놀라울 정도”라며 “유태인의 ‘후츠파(저돌적일 정도로 담대함)’ 정신처럼 도전하는 R&D 생태계를 잘 구축하면 과학기술 선도국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먼저 연구하는 분야를 소개해달라.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감염을 막기 위해 나노미터(㎚·10억 분의 1m) 규모의 병원체 지질막을 선택적으로 파괴하는 전략을 개발하고 있다. 외피 보유 바이러스 입자와 박테리아를 둘러싼 지질막을 표적화하는 혁신 전략을 개발해 네이처, 네이처 바이오테크놀로지 등에서 미래 바이러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막기 위한 유망 전략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항바이러스 펩타이드와 지질막 생명공학 플랫폼 기술은 국내외 기업에 기술이전을 하기도 했다.
-한국의 R&D, 기술 사업화, 기업가 정신 생태계를 미국·중국·이스라엘·싱가포르와 비교하면.
△한국은 매우 뛰어난 연구 역량을 갖고 있지만 사회적 평판과 명성을 중시해 실패를 두려워한다. 반면 미국과 이스라엘은 연구 기술도 최고이지만 리스크 테이킹(위험 감수)까지 한다. 중국도 과학 연구의 질이 크게 발전해 기술력을 동반하면서 한국·싱가포르보다 높은 기업가 정신을 갖게 됐다. 물론 미국에 비하면 질적 성장을 더 해야 한다. 싱가포르는 연구 파워가 강하지만 위험 감수 측면에서 보면 미국·이스라엘과 한국의 중간 수준이다. (싱가포르가 우리나라보다) 좀 더 위험 감수를 하는 과도기에 있다.
-도전하는 연구 환경을 구축하는 게 중요한데.
△한국은 과학기술과 엔지니어링 파워, 잠재력이 매우 크다. 교수·학생·연구자의 능력도 뛰어나다. 연구 문화를 좀 더 혁신하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개방형 혁신을 꾀하고 글로벌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실패 확률이 높은 바이오 제약에서 도전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국은 바이오 제조 시설도 잘 갖추고 기술도 우수한데 비전과 도전 정신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듯하다.
-한국은 길게 내다보지 못하는 연구 환경인 데다 기업가 정신도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은데.
△한국의 기술력, 연구자의 역량, 연구 환경은 매우 좋다. 다만 ‘빨리빨리’ 문화가 있어서인지 미국 등과 달리 단기에 많은 성과를 내려고 한다. 하지만 큰 혁신은 때로는 매우 느리게 진행된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모더나와 화이자 같은 코로나19 관련 메신저리보핵산(mRNA) 백신도 갑자기 나온 것 같지만 지질나노입자(LNP·Lipid Nano Particle) 연구 역량이 지속적으로 축적됐기 때문에 가능했다. 연구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산학연 간 융합 연구를 활발히 해야 할 뿐 아니라 완벽한 연구자가 좋은 연구자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글로벌 연구를 지향한다고 해도 보여주기식에 매달리는 문제점도 고쳐나가야 한다.
-기초과학과 융합 연구가 뒷받침돼야 뛰어난 연구 성과를 달성할 수 있는데.
△요즘 각광받는 LNP 기술의 경우 30여 년 전부터 기초과학을 포함해 다양한 형태로 연구가 시작됐다. 사실 코로나19 사태가 터지기 직전까지도 한국에서는 관련 연구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연구자가 거의 없었고 일부 있더라도 근본적인 이해를 충분히 하는 경우를 찾기 힘들었다. 그런데 mRNA 백신이 상용화하자 갑자기 많은 교수들이 전문가라고 자처하더라. 한국 연구자들은 남을 따라 하는 경향이 크다. 대부분 팬시(fancy·눈에 띄고 멋진) 연구에 더 신경을 쓴다. 일종의 연구 포퓰리즘이라고 볼 수 있다. 미래를 내다보고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정부 R&D 과제들의 성공률이 98%가량이다. ‘도전적 실패’ ‘성실 실패’를 잘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전적으로 동감한다. 대학과 정부 출연 연구 기관 등에서 성실 실패를 인정해야 과감히 도전할 수 있다. 실패하면 불이익을 받는 구조면 안 된다. 한국은 연구의 다양성이 부족하고 일단 성공하는 데 주안점을 둬 두드러진 성과가 부족하다. 정부 R&D 과제비를 지원받아 논문을 쓰고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실패를 용인하고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않으면 영향력이 큰 기술 개발은 요원하다. 제가 박사과정을 밟은 난양공대의 경우 연구를 잘하는 교수에 대해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하지만 도전적이지 않으면 가차 없이 놔두지 않는다. 비록 실패를 하더라도 독창적인 연구 분야를 개척하면 잘 대우해준다. 테뉴어(미국은 종신, 한국과 싱가포르는 65세 정년)를 받더라도 실질적으로 절반은 계속 물갈이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미국 대학의 로열티 수입이 한국 전체 대학의 로열티 수입(연 1,100억 원 이상)을 넘는 곳도 10개 가까이 되는데.
△(하버드대 의학전문대학원 소속) 매사추세츠종합병원을 비롯해 노스웨스턴대,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암센터 등이 블록버스터급 신약 등 바이오 연구를 통해 많은 로열티를 받는다. 제가 학부를 졸업한 플로리다대의 로열티 수입도 한국 대학 전체와 맞먹는 수준이다. 게토레이 같은 스포츠 이온 음료라든지 스포츠 메디신(의료·약물)에 강하기 때문이다. 미국 대학 중에서는 매사추세츠공대(MIT)가 강력한 기술·특허팀과 시스템을 갖추고 기술 사업화를 가장 잘하고 있다고 본다. 미국은 학교 기술·특허팀이 산학 협력 연구를 주도하며 특허와 로열티 전략을 짠다. 반면 한국 대학은 산학 연구를 진행할 때 교수들이 얼마나 연구비를 많이 받느냐에 집중한다. 돈을 대는 기업이 특허·기술이전 등에서 주도권을 행사한다. 대학이 기업 눈치를 보는 경우가 꽤 있다. 한국 대학이 지식재산권과 연구 성과를 주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강력한 특허 전략을 통해 외국 기업들과도 사업화를 많이 진행해야 한다.
-많은 로열티 수입을 올리려면 바이오 기술 사업화가 중요한데.
△한국은 바이오 분야에서 신약 개발 등에 관심이 많지만 반도체 분야 등에 비해 강력한 특허를 만드는 것에 대한 인식은 매우 약한 것 같다. 의사들이 대부분 진료에 집중하고 연구를 활발히 진행하지 못한다. 의사과학자(MD-PhD)도 크게 부족하다. 바이오 연구로 좋은 논문을 쓸 수는 있으나 블록버스터급 신약 등 탁월한 결과물을 만들기는 쉽지 않은 환경이다. 반면 미국 하버드대나 스탠퍼드대 등은 의료와 연구·비즈니스화까지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많다.
-주요국들이 핵심 R&D 인재 유치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수족관의 물고기처럼 되지 않으려면 대학의 자율성과 다양성을 통한 역동성 확보가 중요하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인재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놓았다. 아시아에서는 중국과 싱가포르가 용광로처럼 인재를 빨아들인다. 임팩트 팩터(논문 피인용 수치)를 높이기 위한 논문 공장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이는 기술 사업화와 창업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중국은 천인계획·만인계획을 통해 해외 자국민뿐 아니라 외국 인재까지 흡수한 지 오래다. 싱가포르 난양공대의 많은 교수뿐 아니라 미국 교수들도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다. 물론 미중 과학기술 패권 전쟁으로 인해 미국 연구자 중에는 중국의 초청을 받더라도 거절하는 경우가 늘고 있고 연구 교류에도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미중 양국의 과학기술력을 평가한다면.
△아직도 최상위 연구 논문을 보면 미국 과학자의 것이 많고 ‘삼극특허(미국·유럽·일본에 모두 등록된 특허)’ 등 특허의 질을 따져봐도 미국이 훨씬 낫다. 하지만 예전에는 연구의 질에서 차이가 컸으나 갈수록 격차가 줄고 있다. 중간 수준의 연구는 양국 간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 과거 미국의 과학기술에 의존해 발전했던 중국은 최근 혁신을 통해 자체 기술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가고 있다.
-중국이 국제 학술지에 대한 영향력을 급속도로 확대하는 추세인데.
△글로벌 저널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10년쯤 뒤 중국이 세계적으로 과학기술계의 논문 출간을 컨트롤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글로벌 저널 객원 에디터로서 제출된 논문을 검토하기 위해 중국 과학자를 초청하면 대부분 수락한 뒤 빠르게 의견을 주는데 미국 과학자는 바쁘다며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참여도에도 차이가 있다.
-한국이 ‘과학기술 선도국’으로 도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양성과 선택·집중의 이슈를 균형 있게 조화시키는 게 중요하다. 정부 R&D 과제에서도 트렌드를 따라가면 기초와 다양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대학에서 논문 쓰고 순위를 올리는 것에만 몰입해서는 다양하게 창의적 연구를 할 수 없다. ‘선도 기술 개발’ ‘초격차 기술 확보’ 등의 구호만 외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R&D 시스템과 문화·생태계의 대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He is…
1988년 미국 플로리다주 탬파에서 태어나 플로리다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하버드대-MIT 헬스과학기술(HST) 박사과정을 밟다가 아시아 과학기술의 부상을 눈여겨보고 싱가포르 난양공대 재료공학과로 옮겨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미국 스탠퍼드대 의대에서 박사후연구원을 거친 뒤 난양공대의 교수 영입 제안을 뿌리치고 2019년 성균관대 화학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현재 글로벌 나노바이오사이언스 연구실을 구축해 미국·싱가포르·스웨덴 등과 국제 공동 연구를 활발히 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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