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이슈에 대한 법적 판단으로 사회적 길잡이 역할을 하는 헌법재판소가 상당수 사건에 대해 권고 심리 기일인 180일을 훌쩍 넘기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급한 조치가 필요한 자영업자 방역 조치 헌법소원 등 주요 사안에 대한 ‘골든 타임’마저 놓치고 있어 헌재가 법적 판단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17일 소병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헌법재판소로부터 받은 ‘심리 기간별 미제 사건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 8월 31일 기준 180일이 지난 미제 사건은 1,303건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리 기간별로는 1~2년이 393건으로 가장 많았다. 180일~1년과 2~5년도 각각 336건, 260건이었다. 심지어 5년 이상도 14건에 달했다. 헌재법 제38조에서는 ‘헌재가 심판 사건을 접수한 날부터 180일 이내 종국 결정의 선고를 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다만 강제성이 없는 권고 사항이다.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없다 보니 사회적으로 시급한 사안도 헌재의 법적 판단이 내려지기까지 하세월이다. 자영업자 2명과 5명은 정부 영업제한 조치 등 방역 조치로 평등권과 재산권을 침해당했다며 앞서 1·2월 각각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러나 해당 사건은 처리 권고 기한인 180일을 훌쩍 넘겨 ‘위드 코로나’ 시국으로 접어든 현재까지 기일조차 잡히지 않았다. 임대차 3법도 마찬가지다. 이석연 법무법인 서울 대표변호사(전 법제처장·67)는 올 10월 20일 주택임대차보호법(전월세상한제·계약갱신청구권제·전월세신고제)과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1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이 변호사는 “비교적 판단이 어렵지 않은 사안임에도 헌재가 위헌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있다”며 “최소한의 직무도 이행하지 않고 사법기관의 역할을 포기한 것 아닌지 의문이 든다”고 강하게 불만을 표했다. 정부가 2017년 도입한 암호화폐 규제와 관련해서는 헌법소원이 제기된 지 2년 1개월 만인 지난해 1월 한 차례 공개 변론이 열린 뒤 감감무소식이다. 정희찬 안국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헌법 해석이다 보니 신중하게 심리를 검토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면이 없잖아 있기는 하다”면서도 “국가기관이 기약 없이 사건을 미루는 모습을 보여주니 의뢰인들은 상당히 답답해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해마다 3,000건가량의 사건이 접수되는 데다 매번 새로운 헌법적 쟁점을 검토하다 보니 헌재의 법적 판단이 느려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인원은 한정된 데 비해 사건 수가 많고 내용도 복잡하다 보니 처리 권고 기한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진보 성향 재판관이 상당수인 헌재 구성상 정권의 대표적인 정책들에 위헌판결을 내리기에 부담을 느낀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검사장 출신인 소 의원은 “독일 헌재는 장기 미제 사건을 방치하는 것을 헌법위반이라고 보고 재판지연보상법도 도입했다”며 “지나치게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는 말처럼 헌재는 적시에 사건을 처리해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중요한 사회적 의제를 담고 있는 사건들이 과도하게 늦어지지 않도록 법적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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