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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여름궁전' 화려한 과거 뒤로한 채…돌기둥·연꽃만 덩그러니

[최수문의 중국문화유산이야기] <17> '청나라 최고 원림' 원명원

만주족 강희제 시절 건립후 꾸준히 확장

총 규모 350헥타르…자금성의 8.5배 규모

황제들이 사랑한 '이궁' 으로 전성기 구가

2차 아편전쟁때 英·佛 공격으로 대부분 파괴

신해혁명후 일반인까지 약탈…폐허로 변해

정확한 건물 구조 몰라 복원은 꿈도 못꿔

원명원의 대표적 건축물인 서양루 유적지의 ‘원영관’ 앞에서 한 관광객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대수법’이라는 대형 분수도 있었다.




7월 중국 베이징의 ‘여름 궁전(Summer Palace)’ 원명원(圓明園·위안밍위안)은 연꽃 세상이다. 강수량이 부족하고 건조한 베이징에는 크고 작은 호수가 많이 만들어졌는데 대개 연꽃을 심었다. 그중에서도 원명원의 연꽃이 으뜸으로 평가된다.

원명원에는 200여 종의 연꽃이 있다고 한다. 가족·연인·친구 단위의 방문객들은 삼삼오오 모여 연꽃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호수에는 유람 보트가 지나고 곳곳에 흑조와 청둥오리 등이 헤엄치고 있다. 원명원 면적의 40%가 호수다. 관람객들은 호수 사이로 난 좁은 길을 걸으며 여름을 즐기고 있다. ‘호수공원’인 셈이다. 원래 이 호수들을 둘러싸고 거대한 건물들이 서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베이징 원명원은 중국 근대사의 영광과 좌절인 성쇠영욕(盛衰榮辱)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당시 원명원이라는 거대한 궁전 구역을 조성할 수 있었던 절대 권력 및 경제 번영과 함께 외세의 침략과 왕조 말기적 혼란이 한 곳에 응축돼 있다.

원명원을 처음 찾은 외국인은 열에 여덟아홉은 실망을 금치 못한다. 원명원에 대해 중국인 스스로는 ‘세계 최대의 원림’이라는데 실제 건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베이징의 다른 유명한 문화유산인 이화원(이허위안)과 비교된다. 원명원 내 ‘서양루’라고 불리는 지역에 거대한 돌기둥이 다수 남아 있는 정도다.

원명원이 처음 건설된 것은 만주족 청나라의 강희제 때인 지난 1707년이다. 이후 청나라 황제들이 앞다퉈 확장했다. 총 규모는 350헥타르(㏊)다. 메인 궁궐인 자금성의 8.5배에 달한다. 사실상 ‘이궁’이라고 할 만하다. 이 때문에 원명원은 ‘여름 궁전’으로도 불린다.

만주에서 들어와 중국을 정복했던 청나라는 수도를 베이징에 삼았지만 베이징의 더운 날씨는 참기 어려웠다고 한다. 자금성의 폐쇄적인 구조도 성격에 맞지 않았다. 이는 한족 왕조인 명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그래서 베이징성 밖 서북쪽에 지은 것이 원명원이다. 당시 이 지역들은 성 밖의 빈 땅이었으니 ‘이궁’의 규모는 마음대로 늘릴 수 있었다. 태항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물도 풍부했다.

역대 황제들은 자금성보다 훨씬 많은 기간을 원명원에서 보냈고 실제 업무까지 정상적으로 수행했다. 이 때문에 궁궐 건물과 행정 기구 등이 잇따라 세워졌다.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는 13년 재위 중 한 해 평균 210일을 원명원에서 보냈다. 그는 원명원에서 사망했다.

청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사 전체의 최대 절정기인 건륭제 때는 한 해 평균 126일을 이곳에서 보냈다. 자금성에서는 한 해 평균 110일밖에 있지 않았다. 중국은 지금도 건륭제 때 중국의 국내총생산(GDP)가 당시 세계 총 GDP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경제 대국이었음을 자랑으로 내세우고 있다. 건륭제는 서양루 구역을 세우는 등 원명원을 최대 규모로 확장했다.



다수의 서양식 건물로 이뤄져 있는 서양루는 원래 원명원의 최고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유적이라도 남아 있어 현재는 가장 유명하게 됐다. 중국식 정원에 유럽의 바로크 양식을 접목했다. 사람 키의 몇 배 되는 거대한 석조 기둥들이 화려했던 원래 모습을 추체험하게 해준다.

원명원의 호수에 연꽃들이 화려하게 핀 가운데 파괴된 석조 조각물 위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 원명원의 추락은 이러한 만주족 황제들의 애착으로 초래됐다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으로 베이징을 침공한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조약을 강요하기 위해 본때를 보여주기를 원했다.

당시 황제는 건륭제의 증손자인 함풍제였는데 이때 원명원에 머물고 있었다. 황제를 찾아 원명원에 들이닥친 영·프 연합군은 원명원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 파괴했다. 황제는 이미 청더(일반적으로 ‘열하’로 불림)로 피신한 뒤였다. 원명원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들이 약탈되고 주요 건물들은 파괴됐다. 모두 7본이 제작됐다는 ‘사고전서’ 중에 하나가 원명원 문원각에 있었다가 불에 탔다.

전쟁이 끝나고 원명원을 재건하려는 노력은 있었다. 하지만 기울어지는 국력 상황에 막대한 비용을 조달할 길이 없었다. 재앙은 1900년 의화단의 난으로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공하면서 재연됐다. 이들은 다시 원명원을 약탈했고 그나마 남아 있던 건물들도 철저히 파괴됐다.

청나라가 망하고 신해혁명 후 혼란 상황에서 군벌 정부나 기관은 물론 일반 중국인들도 감시가 약해진 틈을 타 원명원을 파괴했다. 원림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던 건물의 석재들이 잇따라 반출됐다. 지금도 베이징의 주요 건물에는 원래 원명원의 돌이 사용된 곳이 많다. 최후의 일격은 마오쩌둥이 일으킨 광란의 문화대혁명 때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원명원은 텅 빈 상태가 됐다. 1980년대 이후 중국 정부가 보수에 나서 기존 구역을 정비하고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재건하자는 목소리도 있지만 실행은 하지 못하고 있다. 막대한 비용과 함께 정확한 건물 구조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진이나 그림이 일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턱없이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다.

/글·사진(베이징)=최수문특파원 chs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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