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혈액 채취로 여러 질병을 한꺼번에 검사할 수 있다면 어떨까. 혈액검사에서는 여러 번 피를 뽑는 것이 일반적이다. 에이즈·C형간염·B형간염 등 질병마다 이를 진단할 수 있는 장비와 시약이 달라 각각의 질병 검사를 위해 별도의 혈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단 한 번의 채혈만으로도 다양한 질병을 검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단 하나의 장비, 하나의 시약으로 최대 64개의 질병을 한꺼번에 검사할 수 있는 다중 면역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김소연(사진) 피씨엘(241820)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30개국에서 특허를 내고 지난 2008년 피씨엘을 창업했다. 혁신 기술을 바탕으로 세계 30조 원 규모의 혈액 선별 시장에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자 밤낮없이 달리고 있는 김 대표를 1일 서울 송파구 문정동 피씨엘 중앙연구소에서 만났다.
피씨엘의 기술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한 때는 2019년. 김 대표는 국내 업체로는 최초로 초청을 받았던 혈액 진단 관련 국제 워크숍 ‘IPFA·PEI’에서 연구 발표를 했던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폴란드에서 개최된 워크숍에는 로슈·애보트 등 세계적 권위의 혈액 관련 회사 8곳만이 초청을 받았다. 김 대표는 “면역 진단 분야에서는 현재까지도 애보트가 절대 강자인데 당시 참석자들이 발표를 듣고서는 피씨엘이 곧 애보트를 넘어설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줬던 기억이 난다”면서 “사실 당시만 해도 단 한 개의 제품도 못 팔았던 상태인데 기술력 하나만으로 주목을 받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혈액 진단은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유전자(RNA)를 검출하는 분자 진단법과 바이러스로부터 만들어지는 단백질(항원·항체)를 검출하는 면역 진단법으로 나뉜다. 피씨엘과 애보트는 면역 진단 업체다. 문제는 관련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는 애보트가 피를 여러 번 뽑는 단일 진단 방식을 고수하고 있어 혁신 기술이 기존 시장을 침투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하지만 김 대표가 3차원 구조를 기반으로 개발한 ‘솔겔(Sol-Gel)’을 통해 면역 진단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여러 질병을 한꺼번에 검사하려면 채취한 혈액 샘플 안에 질병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바이오마커(생체표지자)’를 최대한 많이 쌓아야 한다. 기존 방식은 바이오마커를 바닥에 납작하게 깔았는데 바닥 면적만큼만 깔 수 있다 보니 한계가 있었다. 김 대표는 바이오마커를 바닥뿐 아니라 위로도 푸딩처럼 쌓아 올릴 수 있는 3차원 구조를 고안해냈다. 김 대표는 “반도체 집적 기술을 활용하면 1차원으로도 바이오마커를 여러 개 깔 수 있지만 이 경우 민감도가 떨어진다”며 "솔겔은 액체에서 고체로 변하는 물질인 ‘졸겔’을 활용해 액체 상태에서 떠다니는 단백질을 고정시킨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피씨엘이 일으킨 혁신의 바람은 국내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고 있다. 한 번의 혈액 채취로 에이즈, C형간염, B형간염, 매독, T세포 백혈병 등 다섯 가지 질병을 한꺼번에 확인할 수 있는 3억 원가량의 ‘하이수’ 제품 한 대를 지난해 대한산업보건협회 산하 한마음혈액원에 공급하게 된 것이다. 제품은 헌혈받은 혈액을 다른 이에게 수혈하기 전 각종 질병을 검사하는 용도로 쓰이는 혈액 선별기다. 올해부터는 국내 헌혈 시장의 95%를 장악한 대한적십자사에 납품을 시도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적십자는 100% 외국 제품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를 국산화하는 것이 목표”라면서 “국내 납품 실적을 토대로 해외 진출도 본격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해외에는 소규모 혈액원이 많은데 이에 맞춰 소형 혈액기 800대를 만들었고 점차 계약이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솔겔 기술만큼이나 김 대표의 이력도 독특하다. 고려대에서 화학을 전공했던 김 대표는 미국 코넬대 생화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국내로 돌아와 LG생명과학기술연구원 선임연구원으로 일했다. 당시 연구원으로서 그는 C형간염 진단 연구를 주로 했다. 이후 동국대 교수로 자리를 옮겨 면역 진단 연구를 하던 그는 해당 분야의 혁신이 절실함을 느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연구를 하다 보니 1971년에 개발된 ‘엘라이자’ 기술이 40년 넘게 주로 쓰이고 있었다”면서 “기술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혁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문제점을 직접 해결하고 싶었지만 교수에서 사업가로의 변신이 쉽지는 않았다. 김 대표는 “사실 처음부터 솔겔 기술을 상용화할 생각은 없었다”면서도 “당시 유수의 혈액 진단 업체들로부터 기술이전 제안도 받았는데 제안을 들어보면 결국에는 이 기술을 사장시키려는 속셈이 보였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직접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부터는 혈액 선별기에 더해 코로나19 자가 진단 키트로도 주목받고 있다. 피씨엘 제품은 콧속 또는 입안 깊이 면봉을 넣는 비인두 방식뿐 아니라 타액을 이용해서도 검사가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단순하게 침만 뱉어 10분 이내에 코로나19 항원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임상 민감도는 약 94%, 임상 특이도는 약 99.99%다. 지난해 12월 오스트리아 부르켄란트주 정부 납품을 시작으로 독일·파키스탄 등 전 세계 50개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자가 진단 키트를 출시할 예정이다. 김 대표는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고 불량률은 줄이기 위해 (제품 생산 과정을 자동화하는) 스마트 공장을 도입할 예정”이라면서 “국내와 해외 공장에서 동일한 시스템을 설정하면 같은 품질의 제품을 전 세계에 공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피씨엘과 같은 혁신 기업이 성공하려면 국내 규제 기관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규제 기관에서 허가를 내줘야 제품 판매가 시작되는데 심사 기간이 지나치게 길고 절차도 보수적이라는 것이다. 당장 피씨엘이 국내에서 추진 중인 전문가용 코로나19 진단 키트만 봐도 그렇다. 체외 진단 제품인 만큼 몸에 부작용을 일으킬 우려는 찾아볼 수 없는데 올 2월 식품의약품안전처에 허가를 신청한 후 3개월 넘게 감감무소식이다. 전문가용 허가를 받아야 자가 진단 키트 허가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자가 진단 키트 허가는 신청도 못했다. 김 대표는 “인력 부족을 항시 겪고 있는 식약처의 입장도 이해가 간다”면서도 “일단 한시적으로 판매를 허용한 뒤 추후 실적과 제품 평가를 하는 선 진입, 후 평가 제도를 신기술에만 적용할 게 아니라 신제품에도 적용하는 등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허가 담당 공무원에게 일종의 면책특권을 주는 것도 방법이라고 말했다. 2019년 소위 ‘인보사 사태’ 이후 식약처의 심사가 더욱 보수적으로 바뀌었는데 추후 제품에 문제가 생겨도 담당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보사 사태는 코오롱티슈진이 개발한 유전자 치료제 ‘인보사’가 국내 첫 유전자 치료제로 식약처의 허가를 받았지만 이후 주성분 중 하나가 허가 사항에 기재된 연골 세포가 아닌 종양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신장 세포라는 사실이 밝혀진 사건이다. 김 대표는 “안전성을 꼼꼼히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체외 진단 기기와 같이 안전성 문제가 적은 제품에 대해서까지 보수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나 싶다”면서 “한때 규제 샌드박스 등 혁신 기업을 위한 다양한 제도가 만들어졌었는데 지금은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전부 자취를 감췄다”고 밝혔다.
피씨엘은 현재 30조 원 규모인 세계 혈액 선별기 시장에서 점유율 10%, 매출 3조 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코로나19 진단 키트 분야에서도 연내 모로코·파키스탄·아프리카 등 세 곳에 해외 공장을 짓고 공급 규모를 늘려갈 생각이다. 김 대표는 “장기적으로는 혈액과 관련된 모든 분야에 도전하고 싶다”며 “맞춤형 혈액, 인공 혈액 등의 부문에도 관심이 많은데, 특히 인공 혈액은 개발에 성공하면 바이러스 검사 자체가 필요 없기 때문에 가장 흥미로운 분야”라고 말했다.
/이주원 기자 joowonmail@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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