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순국 제110주기 추모식이 26일 오전 10시 서울 남산의 안중근 의사 동상 앞에 개최됐다.
안중근의사숭모회 주관으로 열린 이번 추모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지난해 비해 규모가 축소됐다.
국가보훈처는 “외부 인사 초청 없이 안중근 유족과 숭모회 회원만 참석한 가운데 국민 의례, 안중근 최후유언 낭독, 추모식사, 헌화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며 “주최 측은 안중근 순국 110주기를 맞아 정부 대표, 국내외 기관장 및 시민 등 300여명을 초청해 안중근의사기념관 강당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상황으로 계획을 변경했다”고 전했다.
숭모회는 이번 추모식을 축소해 개최하는 대신 안중근 순국 110주기의 의미를 담은 동영상을 제작해 숭모회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중국 하얼빈 ‘안중근의사기념관’도 추모식을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상황으로 기념관이 문을 닫으면서 현지 추모 행사가 열리지 못했다.
박삼득 보훈처장은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을 직접 방문해 안중근 묘소(가묘)를 참배했다.
보훈처는 안중근의 유해를 찾기 위해 중국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으며 남북 공동 유해 발굴을 위한 관계부처 협의도 지속하고 있다. ‘안중근의사유해발굴추진단’은 최근까지 전문가 자문과 중국 현지 조사 등 유해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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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9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안중근은 1905년 을사늑약 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국권 회복의 길을 강구하다가 귀국했다. 사재를 털어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고종황제의 폐위와 군대 해산 등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08년에는 의군장이 돼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해 경흥과 회령 등지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했다.
이후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등지를 오가며 동지들과 구국의 길을 모색했고, 1909년 봄에는 김기룡, 조응순, 황병길 등 동지들과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결성했다.
1909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그는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다. 의거 당일인 10월 26일 9시께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던 이토를 향해 총을 쏘아 3발 모두 명중시켰다. 러시아 헌병이 체포하려고 하자 하늘을 향해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안중근은 1909년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뤼순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돼 심문과 재판을 받으면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 행위를 공박하며 시정을 요구했다. 조국의 완전 독립과 아시아의 평화 정착을 주장했던 그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6일 순국했다. 정부는 안중근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한편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의 친일행위는 도마위에 오르고 있다. 안준생은 아버지가 순국한 후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를 봉안한 박문사에서 사죄하고 또 히로부미 아들을 만나 사과를 했다. 이뿐만 아니라 한일합방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다니는 등 안중근의 아들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의 친일행각을 했다. 이에 김구 등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을 했던 인사들은 “안준생은 민족의 반역자”라고 손가락질 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안준생이 친일파가 된 것은 국가가 안중근의 가족을 전혀 돌보지 않아 생계가 어려웠기 때문에 어쩔 수없는 선택이었다”며 “안준생을 비난하기 전에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의 가족을 돌보지 않았던 국가가 먼저 반성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김정욱기자 myk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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