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핵심계열사인 대한항공(003490) 사내이사직을 27년 만에 상실했다. 주주총회에서 등기임원 재선임 안건이 표 대결로 부결되며 기업 회장이 직함을 내려놓은 최초의 사례다. 정부의 입김이 강한 2대주주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한 점은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총수 일가가 빚은 사회적 물의를 단죄하는 것은 맞지만 재판이 끝나지 않은 사건인데도 국민연금이 개입해 경영권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우려했던 ‘연금사회주의’가 어디로 튈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다. 27일 서울 강서구 본사에서 열린 제57회 대한항공 정기주주총회에서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안이 부결됐다. 조 회장 연임안은 찬성 64.09%, 반대 35.91%로 참석 의결권의 3분의2(66.7%)를 넘지 못해 부결됐다.
조 회장은 지난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해 18년 만인 1992년 대표이사 사장인 등기임원이 됐다. 1999년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 2003년에는 한진그룹 회장에 올라 대한항공이 글로벌 항공사로 키웠다. 하지만 재선임이 불발되면서 1992년 이후 27년 만에 등기임원직을 상실해 직접적인 경영권한을 내려놓는다. 총수 일가가 주총 표 대결을 통해 직을 잃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족들의 물의가 국민의 공분을 산데다 2대주주인 국민연금(11.56%)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이 직격탄이 됐다. 재선임 기준(66.7%)에 2.6%포인트가 부족해 안건이 부결됐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해 경영권을 좌지우지하는 연금사회주의 확산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높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국민연금이 (대주주 일가의 재판 등)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무죄로 추정해야 하는 원칙에 반한 결과”라고 발표했다.
한편 국민연금은 이날 모회사인 한진칼 석태수 대표의 선임권에는 찬성해 그룹 전반의 지배구조를 흔드는 선은 넘지 않았다. 조 회장 측은 한진칼 대주주의 권한으로 대한항공에 제한적 경영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구경우·김상훈·박시진기자 bluesquar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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