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만난 어느 상장사 임원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이달 말 주주총회를 앞두고 소액주주연대가 사내이사 선임과 대규모 배당 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사내보유금과 맞먹는 수백억원의 고배당은 물론 비전문가인 소액주주를 이사회 멤버로 들이기는 사실상 불가능한데 상당수 표를 모은 소액주주 측이 워낙 강경해 속만 타들어 가고 있다.
# 밸류파트너스자산운용은 미국 투자회사인 돌턴인베스트먼트와 손잡고 현대홈쇼핑의 배당안 등 주총안건 대부분을 반대했다.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인 SC펀더멘털은 무학에 상당한 배당과 감사선임을 제안했고 강남제비스코·태양에 대해서도 주총안을 내놓았다. 특히 강남제비스코 안의 7배나 되는 배당금을 요구해 마찰을 빚고 있다.
3월 주총시즌을 맞아 ‘주주 행동주의’라는 낯익지 않은 용어가 곳곳에서 들린다. 주주가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 경영에 적극 개입하는 것인데 그간 대주주에 묻혔던 여타 주주들의 목소리를 내자는 취지에서는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대기업 지배구조를 글로벌 흐름에 맞게 바꿔야 한다는 정부 방침 아래 지난해 7월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게 결정적 계기로 해석된다. 이에 보조를 맞추는 양 해외 굴지의 헤지펀드나 대형 글로벌 자산운용사는 물론 한진그룹과 분쟁 중인 KCGI를 비롯한 토종 행동주의 펀드들이 당당하게 경영 참여를 외친다. 기업 활동에 무심했던 소액주주들도 주가 부양 등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한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낯선 풍경에 대해 정부는 환영의 박수를 친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주 말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자본시장 플레이어의 인식 자체가 바뀌었고, 기업들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며 “올해 주총은 기업의 지배구조 변화를 위한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십수년 전부터 참여연대에서 기업의 지배구조 선진화를 외쳤던 김 위원장으로서는 감회가 남다를 법도 하다.
하지만 경영계에는 여전히 ‘소버린 사태’의 트라우마가 짙게 남아 있다. 글로벌 사모펀드인 소버린자산운용은 지난 2003년 3월부터 SK의 지분 14.99%를 확보해 2대 주주가 된 뒤 최태원 회장 등 경영진 교체와 계열사 청산을 요구했다. SK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자사주를 매입, 경영권을 방어했고 소버린은 2005년 1조원의 시세차익을 본 뒤 철수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04년 영국계 헤지펀드 헤르메스는 삼성물산 지분 5%를 보유한 뒤 우선주 소각을 요구했고 2006년 칼 아이칸은 KT&G 주식을 매입해 경영에 개입한 뒤 1,500억원의 차익을 거두고 손을 털었다.
만일 SK가 소버린의 요구대로 최 회장을 교체하고 경영에 참여시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최 회장이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자투성이였던 하이닉스를 인수해 반도체 신화를 이룬 것은 고사하고 눈부시게 변모한 작금의 SK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이는 기업의 미래에 과감히 베팅할 수 있었던 오너의 결단이었기에 가능했지 단기차익에만 불을 켜던 헤지펀드들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오는 22일 주총을 앞둔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에 8조3,000억원이라는 도를 넘은 배당을 요구한 엘리엇의 행보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과거 기업사냥꾼으로 비난받던 해외 펀드들이 주주 행동주의를 표방하며 마치 정의의 사도처럼 굴지만 자칫 글로벌 추세라는 미명 아래 그들의 계략에 넘어가면 국가나 기업이나 주주 모두 막대한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기업들의 미래 경쟁력 확보를 저해하고 기업가치와 주주가치를 훼손할 수 있는 주주 행동주의는 갈수록 확대되고 고도화될 것이라는 게 다수 전문가의 견해다. 결국 생존문제와 직결된 경영권 방어의 벽을 공고하게 칠 수밖에 없다. 미국·영국·프랑스 등에서 인정한 차등의결권, 포이즌필, 황금주 등의 ‘무기’를 서둘러 장착하고 대주주 의결권을 제한하는 낡은 ‘3%룰’ 규제도 폐지하자. 반면 투기자본에 유리한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집중투표제 의무화, 감사위원 분리선임 등의 상법 개정안 추진은 손발이 묶인 기업을 더 옥죌 게 뻔하다. 제2의, 제3의 주주 행동주의 떼들이 몰려오고 있다.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jshong@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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