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토론
“결정하십시오!” 진행자의 목소리가 우르렁 소리를 내며 퍼져나왔다.
그 주제는 최근 경제 분야의 주요 토론거리 중 하나였다. 과연 비트코인 등 신흥 대안화폐는 금융서비스의 미래인가, 아니면 21세기 폰지 Ponzi 사기인가?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멕시코 데이터센터 업체 KIO 네트워크 KIO Networks가 지난 9월 말 멕시코시티에서 토론회를 개최했다. 장소는 사방이 그래피티로 칠해진 이포드로모 콘데사 구의 어느 연기 자욱한 회의실이었다. 실내는 곡예적 동작과 화려한 마스크로 유명한 멕시코식 레슬링 ’루차 리브레 lucha libre‘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이날 행사의 핵심은 미국에서 온 저명인사 두 사람의 대결이었다. 양측 모두 신원이 확실했고, 굳이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링의 한쪽에는 뉴욕타임스 기고가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Paul Krugman이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한쪽에는 연방 검사로 승승장구하다가 최근 벤처투자자로 전향한 캐스린 혼이 있었다.
크루그먼의 입장은 예측하기 쉬웠다. 그는 암호화폐(비트코인 같은 컴퓨터화된 화폐를 기반으로 제공되는 탈중심적 디지털 서비스)가 귀금속이 화폐 역할을 했던 과거로의 불필요한 회귀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새 시대를 앞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 제이미 다이먼 Jamie Dimon JP모건 CEO, 워런 버핏 등도 암호화폐 열풍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크루그먼의 비판은 가차가 없었다. “15년 후면 암호화폐는 펫츠 닷컴 Pets.com/*역주: 2000년대 닷컴버블의 상징/과 비슷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혼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가상화폐와 그 기반 기술이 사회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탐욕스러운 은행과 인터넷의 독점적 지배자들이 가져간 힘을 되찾을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이었다. “페이스북,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이 모든 규칙을 통제하고 있다. 그들 손 안에 모든 사용자가 있다. 모든 힘을 쥐고 있는 것이다.” 혼은 암호화폐가 열정적인 창업 개발자들에게 경쟁 기회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암호화폐 지지자들이 가진 민주화의 꿈을 내세운 것이었다.
거대도시 멕시코시티의 기술 엘리트들로 구성된 청중 다수가 혼을 지지했다. 그녀의 이미지도 호감을 샀다. 발표를 시작하기 앞서, 혼은 자신이 검사 시절 부패혐의로 기소한 미국 법 집행기관 직원들의 머그 샷/*역주: 범죄인 식별 사진/을 대형 스크린 5개에 띄웠다. 그러나 청중들은 그녀가 한때 암호화폐라는 새 개척지의 보안관이었다는 사실에만 환호하지는 않았다. 혼이 이제는 그들의 편이라는 사실도 중요했다. 최근 유명 실리콘밸리 벤처투자사인 앤드리슨 호로비츠 Andreessen Horowitz의 파트너로 합류하면서, 혼은 암호화폐 세계의 다음 히트작을 찾아내는 임무를 맡았다. 차기 히트작의 창조자들이 성공 과정에서 법을 준수하도록 돕는 것도 그녀의 역할이다.
혼은 다소 위태로운 시기에 이직을 했다. 암호화폐 시장은 올해 내내 폭락을 하고 있다. 지난 1월 시총 8,000억 달러를 돌파할 정도로 열광적이었던 세계적 가상화폐 투기 열풍이 이젠 2,000억 달러까지 떨어졌다. 비트코인은 전체 가치의 3분의 2를 잃었고, 2위 암호화폐 이더리움은 90%나 폭락했다.
그러나 혼과 동료들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투자 열풍에 거품이 끼는 건 흔한 일이다. 만약 암호화폐에 대한 지지자들의 믿음이 옳다면, 거품이 꺼진 자리에 새로운 산업이 탄생할 것이다. 앤드리슨 호로비츠의 공동창업자 벤 호로비츠 Ben Horowitz는 자신의 경험을 활용해 최초의 상업용 웹브라우저 넷스케이프를 개발했다. 비록 벤처기업으로선 결함이 있었지만, 넷스케이프는 현대 인터넷의 모태가 됐다. 인터넷 업계에 수십 억 달러 이익을 가져오기도 했다. 혼은 전문 투자자로서 자신의 경험 부족에 크게 개의치 않고 있다. 그녀는 “기업가들이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되려면 그들에게 전략적 비전, 설득력, 추진력 있는 사람으로 인식돼야 한다”며 “연방 검사도 FBI 요원 등 다른 관계자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같은 능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가교 역할은 혼이 가진 주요 특징 중 하나다. 기업 이사회에서 그녀와 함께 활동한 바 있는 페이스북 고위 임원 데이비드 마커스 David Marcus는 “혼은 공직 경험과 비즈니스적 마인드를 동시에 갖춘 드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최근 은퇴한 앤서니 케네디 Anthony Kennedy 전 미 연방대법관도 혼에 대해 “그 정도의 재능과 배경을 가진 사람이 신생 분야에 몸을 담았다는 사실에 상당히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그녀는 케네디 밑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케네디는 혼이 “법조계와 사이버 시대를 잇는 매우 중요한 연결점이다.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II. 검사가 트렌드세터를 만난 날
벤 호로비츠가 캘리포니아 주 멘로 파크 Menlo Park에 위치한 집무실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는 래퍼 내스 Nas의 흑백 포스터를 배경으로 소파에 앉아 있다. 미식축구팀 오클랜드 라이더스 Oakland Raiders의 유니폼을 입은 마네킹이 그의 책상 앞을 지키고 있다. 앤드리슨 호로비츠의 괴짜 이미지와 어울리는 장식들이다. 앤드리슨 호로비츠는 스카이프 Skype, 차량공유 서비스업체 리프트 Lyft, 웹호스팅 서비스업체 깃허브 GitHub 등 여러 투자에 성공하며 창립 9년 만에 실리콘밸리 최고 벤처투자사 반열에 올랐다.
앤드리슨 호로비츠는 자사를 트렌드세터로 정의한다. 70억 달러 이상을 운용하고 있는 이 회사는 암호화폐에 공격적으로 투자한 최초의 투자사 중 한 곳이다. 암호화폐 가치가 폭락했던 올 여름, 회사는 이 분야에 집중하는 3억 달러 규모의 별도 펀드를 출시하기도 했다. 호로비츠는 자신 있는 말투로 현 시점을 IT 투자 초기와 비교했다. 닷컴 거품 이후엔 인터넷 기업에 투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많이 퍼졌었다. “그건 인터넷에 투자할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나 말하는, 가장 어리석은 교훈이다. 나는 암호화폐가 그 때와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앤드리슨 호로비츠는 이미 암호화폐 관련 기업 다수에 투자한 바 있다. 기업가치 80억 달러로 추산되는 디지털 자산 거래소 코인베이스 Coinbase, 세계 3위 암호화폐 XRP의 모기업 리플 Ripple, 암호화폐 가격에 따라 가치가 큰 폭으로 등락하는 헤지펀드사 폴리체인 캐피털 Polychain Capital 등이다. 회사는 심지어 이더리움 블록체인 기반 ’가상 고양이 거래 게임‘(농담이 아니다!) 크립토키티 CryptoKitties를 만든 대퍼 랩 Dapper Labs에도 투자했다.
워낙 새로운 개념이다 보니 디지털 화폐와 블록체인은 그 누구도 장기투자 실적을 말할 수 없다. 혼 같은 인물의 영입이 쉬웠던 이유다. 호로비츠는 “나도 투자자로서의 경험은 짧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넷스케이프의 초기 임원이었으며, 마크 앤드리슨 Marc Andreessen과 함께 옵스웨어 Opsware라는 소프트웨어 업체를 공동 창업한 바 있다. “우리 중 대다수는 입사 당시 엄청난 경험자가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올해 43세인 혼은 여러 측면에서 앤드리슨의 틀에 맞지 않는다. 그녀는 앤드리슨 호로비츠 최초의 여성 제너럴 파트너(벤처캐피털사 최고위직)다. 이 회사의 파트너 상당수는 기업 창업자인데, 혼은 그런 경력을 갖고 있지 않다. 그녀는 경력의 대부분을 사기업과 거리가 먼 공직에서 쌓았다. 혼과 함께 암호화폐 펀드를 이끌고 있는 크리스 딕슨 Chris Dixon은 “그녀는 업계 경험 대신 규제 관련 노하우와 창업가 같은 외부인들이 암호화폐에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우리는 지금 암호화폐의 혜택을 적극 홍보해 더 많은 인재들을 끌어 모아야 한다. 혼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업계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석유업체 중역의 딸로 태어난 혼은 어린 시절을 미국 텍사스와 콜로라도 주, 이집트, 그리스, 프랑스 등 전 세계를 떠돌며 보냈다. 그녀는 ‘기업법을 전공하면 전 세계를 무대로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스탠퍼드 대학 로스쿨에 진학했다. 현재 워싱턴에서 기업법 소송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는 대학 시절 친구 데렉 섀퍼 Derek Schaffer에 따르면, 당시 혼은 “주변의 로스쿨 학생 중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늘 뭔가를 하는” 학생이었다. 섀퍼는 혼이 기숙사 방에 러닝머신을 설치해 놓고 판례를 읽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혼은 졸업 후에도 성장 페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업계 최고 로펌 중 하나인 크래버스, 스웨인&무어 Cravath, Swaine & Moore 제안을 받아들여 뉴욕으로 이사할 채비를 마쳤다. 그러나 이후 마음을 바꿔 순회법정 재판연구원 인턴직을 수락했다. 젊은 법조인들에게 꿈의 자리인 연방대법원 대법관(케네디) 휘하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였다. 혼은 2006년 버지니아 동부 연방지방법원 법원장 사무실에 들어갔다. 빠른 일 처리와 연방 대법원과 가깝다는 특성 때문에 ’총알 법정(rocket docket)‘이라는 별명을 얻은 법원이었다. 그녀는 국가안보와 테러 관련 사건을 맡았다. 무선통신 기지국에서 삼각 측량으로 얻은 지리정보 데이터 등 당시의 신기술로 확보한 전자 증거들을 활용할 수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3년 후 혼은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교도소 대상 소송, 오토바이 갱, 살인자, 마약 카르텔, 자동차 절도범, 횡령범 등을 기소하는 역할이었다. 그는 사망고객 계정을 개설한 혐의로 미국 대형 은행 웰스 파고 Wells Fargo를 기소하기도 했다(그로 인해 웰스파고는 월가 규제그룹에 200만 달러 벌금을 물었다). 그건 웰스 파고 직원들의 유령계좌 부정활용 스캔들이 터지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그러다 지난 2012년, 혼은 상부에서 기소사건을 배정 받으면서 비트코인이란 단어를 처음으로 듣게 됐다. 당시 비트코인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지만, 그녀는 그리 오래지 않아 비트코인 최대 약점을 간파했다. 당시 비트코인은 사기꾼, 성인물 제작자 등 수상한 사람들이 선호하는 거래 수단이었다.
혼은 이듬해 미 법무부, 국세청, 재무부 금융범죄단속 네트워크(Financial Crimes Enforcement Network) 등 유관기관들과 합동으로 미 연방정부 최초의 ’디지털 화폐 태스크포스‘를 창설했다. 이 TF는 당시 세계 최대 비트코인 거래소였던 마운트곡스 Mt. Gox의 치명적 해킹 사건을 수사했다. 이후에는 연방 당국에서 돈세탁 혐의를 받던 암호화폐 거래소 BTC-e의 기습 체포도 주도했다(현재 여러 국가가 BTC-e 소유 혐의자의 자국 송환을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들을 통해 혼은 실리콘밸리의 유명 인사가 됐다. 당시 투자자들은 암호화폐에 대해 범죄행위 못지 않게 합법적 벤처로서의 가능성이 무르익었는지도 탐색 중이었다. 하버 Harbor의 CEO 조시 스타인 Josh Stein은 “혼은 기업가로서 놀라운 재능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하버는 기존 주식의 ’토큰화‘가 사업모델인 암호화폐 벤처로, 앤드리슨 호로비츠의 투자를 받았다). “혼은 한 가지 사건을 여러 사건으로, 전문 분야로, 자신의 공적 개성으로, 공공선을 위한 공공 정책으로 바꿔 나갔다.”
III. 커리어 탐색
정계에 진출하는 유명 검사도 있었지만, 혼의 선택은 달랐다. IT업계에서 명성이 높아지자, 그녀는 벤처기업들 사이에서 촉망 받는 존재로 떠올랐다. 여전히 검찰 소속이었던 2015년, 혼은 암호화폐 업계의 초기 헤지펀드 매니저 댄 모어헤드 Dan Morehead의 자택에서 열린 비트코인 투자자 행사에 참석해 정부 암호화폐 TF의 업무를 소개했다. 그때 일부 참석자들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Z캐시 Zcash라는 암호화폐 개발사 CEO로, 자칭 자유의지론적 ’사이버펑크‘/*역주: 수신자만이 알 수 있는 암호로 정보를 보내는 프로그래머/인 주코 윌콕스 Zooko Wilcox는 혼이 “무서웠다”고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혼이 참석자들과 같은 사고 방식을 가졌음이 밝혀지면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게다가 그녀는 참석자들의 기업이 미로 같은 규제를 헤쳐나가는 데 꼭 필요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혼은 암호화폐 업계 관련 행사의 단골 연사가 됐다. 그녀는 버진그룹 CEO 리처드 브랜슨 Richard Branson의 사유지 네커 Necker 섬에서 열린 블록체인 이벤트에 연사로 참석했다. 2016년에는 TEDx 강연도 했다. 올 9월에는 전 구글 CEO 에릭 슈미트 Eric Schmidt의 초대로, 콜로라도 주 애스펀 Aspen에서 열린 소수 엘리트 대상 휴양 행사에도 참석했다. 이런 자리에 설 때마다, 혼은 자신이 한때 기소했던 기업들의 기술이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일관성 있게 설득했다.
2015년 9월, 비트코인 컨퍼런스에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혼은 비행기 안에서 체인 Chain이라는 금융 소프트웨어 벤처의 공동 창업자들을 만났다. 그는 체인에 소액을 투자했다. 개인으로선 첫 번째 벤처투자였다. 그녀는 이 투자가 미 법무부 공직윤리실의 허가를 받았다고 밝혔다(당시 혼은 암호화폐에 투자할 수도 있었지만, 향후 문제 소지를 우려해 투자하지 않는 편을 선택했다). 그녀의 업계 인맥은 확대됐고, 일자리 제안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기술기업 임원직도 있었다. 혼은 실리콘밸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민간의 러브콜을 받던 시기에 대해, 그녀는 검사가 되기로 했던 때와 비슷한 “계시”를 받았다고 표현했다. “법조계에서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했다는 느낌이었다.”
혼은 2017년 법무부에 사표를 낸 후 코인베이스의 이사회에 즉각 합류했다(이번 호에 실린 ‘대마불사를 꿈꾸는 코인베이스’ 기사 참조). 이를 계기로 앤드리슨 호로비츠의 암호화폐 및 관련 벤처 투자 총괄역인 크리스 딕슨과 만났다. 유사한 투자를 진행할 파트너를 찾고 있던 딕슨은 혼의 법적 전문성을 존중했다. 그 밖에도 그녀에겐 ▲검사 경력 ▲연사로서의 경험 ▲교육자 활동 병행 이력(스탠퍼드 대 로스쿨과 경영대학원에서 암호화폐를 강의했다)도 있었다. 역사가 일천해 사기와 농담 취급을 받던 암호화폐 업계에겐 딱 맞는 대변인이었다.
혼에게도 즐거운 선택의 시간이었다. 그는 지난 2월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사이버안보 업체 해커원 HackerOne의 이사회에 합류했다. 이 무렵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 법원장 선임위원회와 제9 연방순회법원 판사 선임위원회 등이 그녀에게 접근했다. 인정 받는 자리였지만, 앤드리슨 호로비츠 파트너직에 비할 순 없었다. 혼은 올해 초 딕슨의 제의를 받자 곧바로 수락했다.
IV. 샌드 힐 로드
9월 초 어느 월요일,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혼은 유독 밝은 표정으로 터키석 빛깔/*역주: 연한 청록색/의 눈을 반짝거렸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사무실 입주 준비도 못 마친 시점에서, 앤드리슨 호로비츠 측이 과거 아마추어 엔젤 투자자 시절 했던 첫 벤처투자가 열매를 맺은 것이었다. 2015년 혼이 투자한 체인의 매각 소식이었다. 액수를 밝히진 않았지만, 그녀의 소소한 투자는 4배로 불어났다.
혼은 이 일로 자신감을 얻었다. 앤드리슨 호로비츠에 투자를 요청한 숱한 벤처기업 가운데 유망주를 골라내기 위해선 꼭 필요한 자신감이었다. 그녀는 매주 평균 10개 업체의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있다. 올 여름에는 너무나 많은 요청이 쇄도해 첫 출근일이 9월에서 6월로 당겨질 정도였다.
앤드리슨 호로비츠가 자사의 암호화폐 펀드를 미 증권거래위원회(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SEC)에 등록하는 방식은 벤처투자사보단 헤지펀드에 가깝다. 보통 벤처투자는 ‘출구(exit)’, 즉 기업 매각이나 상장이 이뤄지기 전까진 투자를 유지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반면 헤지펀드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요인들에 기반해 지분을 사고 판다. 혼은 자신이 장기투자를 지향한다고 밝혔고, 벤처투자 평균인 5~10년 정도를 대략적인 기간으로 제시했다. 이는 앤드리슨 호로비츠 암호화폐 펀드가 투자하는 암호화폐와 기타 디지털 자산의 등락은 진폭이 크지만, 이런 자산에 장기 투자할 의향이 있다는 뜻이었다.
혼과 딕슨은 분야별로 역할을 나눌 계획이다. 혼은 소비자 대상 응용상품, 딕슨은 개발자용 툴 등 좀 더 기술적인 상품을 맡게 된다. 딕슨은 “내 약점은 인간, 강점은 기계 부문”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다.
혼이 특히 관심을 가진 분야 중 하나는 해외 송금이다. “미국 밖 몇몇 지역에서 암호화폐가 가진 잠재력 일부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집트와 그리스를 예로 꼽았다. 이들 국가의 금융 환경은 실리콘밸리에선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좋지않다. “이들 국가에서 금융 자유와 금융 포용성, 환전, 국제 송금은 때론 너무나 먼 나라 얘기다.”
혼은 앤드리슨 호로비츠가 투자한 결제 블록체인 개발업체 셀로 Celo를 예로 들었다. 셀로는 저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개도국에선 인기 있는 인터넷 접속 기기다)에 자사 기술을 최적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혼은 멕시코시티에서 열렸던 크루그먼과의 토론에서도 송금에 대해 강조했다. 연 6,000억 달러에 달하는 국제송금 시장에서, 연 240억 달러 규모인 미국과 멕시코는 가장 활발한 시장이다. 그러나 최근 기술의 엄청난 발전에도, 두 나라 간 송금은 여전히 느리고 비효율적이다. 혼은 “앞으로 10년 내에 국제송금은 웨스턴 유니언 Western Union 은행 지점에 가서 전보를 부치는 것보단 휴대전화에서 이메일을 보내는 것과 더 비슷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혼은 과거에 기반해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초기 자동차 구매자들은 ‘차를 왜 사나? 말과 마차가 잘 굴러가는데’라는 말을 듣곤 했다.” 초기 인터넷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만약 자신이 1994년에 “‘우린 나중에 주머니 속에 작은 기계를 넣어 다닐 거야. 2시간짜리 영화를 다운로드해서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고, 그걸로 장도 볼 거야’”라고 말했다면, “아마 다들 나보고 미쳤다고 했을 것이고, 아마도 그건 맞는 말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혼은 이포드로모 콘데사에 모인 청중들에게 암호화폐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암호화폐 네트워크의 부진, 비용 문제, 미숙함 등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게 그녀의 주장이었다. “현재는 암호화폐의 전화모뎀 시대다. 회의론자들은 혁신의 현재 수준과 최종 수준을 혼동하는 것 같다.”
벤 호로비츠는 암호화폐의 혁명적 잠재력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거의 모든 것이 암호로 귀결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조직을 구성하는 방식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새 파트너인 혼이 몇 건의 투자에 성공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암호화폐 투자를 분산하고 있는 벤처캐피털
앤드리슨 호로비츠는 걸음마 단계인 암호화폐 업계에 가장 먼저, 가장 과감한 투자를 단행한 투자자 중 한 곳이다. 이 회사는 2013년 첫 투자 이후, 비트코인 관련 업체에 수백만 달러를 투자했다. 이젠 별도의 암호화폐 펀드까지 출범해 그 기세가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코인베이스 Coinbase: 코인베이스는 암호화폐 업계의 뉴욕 증권거래소라 할 수 있다. 소비자 친화적인 화폐거래 기능 외에도 암호화폐 관리 서비스, 모바일 지갑 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비상장 기업인 코인베이스의 가치는 약 80억 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리플 Ripple: 2013년 4월 앤드리슨이 고른 첫 투자 대상으로, 옛 이름은 오픈코인 OpenCoin이었다. 리플이 만든 암호화폐 XRP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에 이어 총액 기준 세계 3위에 올라있다.
-언닷컴 Earn.com: 원래는 21.co라는 이름의 비트코인 채굴 업체였지만, 2017년 사명을 바꾸고 유료 메시지 전송 네트워크로 변신했다. 코인베이스가 지난 4월 1억 2,000만 달러에 이 회사를 인수했다. 이후 앤드리슨 호로비츠의 파트너였던 언닷컴 CEO 발라지 스리니바산 Balaji Srinivasan을 최고기술책임자로 선임했다.
-미디어체인 랩스 Mediachain Labs: 미디어체인 랩스 Mediachain Labs는 음악가의 작품 이력을 추적할 수 있는 비트코인 기반 데이터베이스를 개발했다. 이 회사는 작년 초 스포티파이 Spotify에 인수됐다. 공동창업자 제스 월든 Jesse Walden과 데니스 나자로프 Denis Nazarov는 앤드리슨 호로비츠 암호펀드의 파트너이기도 하다.
-오픈바자 OpenBazaar: 오픈바자 OpenBazaar는 원래 온라인 마약 판매 사이트 실크로드 Silk Road에 착안해 만든 P2P 오픈마켓이다. 아마존과 비슷한 방식이지만, 암호화폐로 결제를 한다는 점에선 차이점이 있다.
▲암호화폐가 취할 다음 스텝
앤드리슨 호로비츠 암호화폐 펀드의 공동 매니저라는 새 역할을 맡은 캐스린 혼이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들을 소개한다.
-송금: 국경 간 송금 중개업체들은 평균 7.5%의 수수료를 받고 있다. 혼은 암호화폐가 이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정체성: 혼은 범죄자 추적 과정에서 출생증명서 등 신상 서류를 위조 판매하는 암시장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블록체인이 이런 사기를 근절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안정성: ‘고정가격형’ 토큰은 다른 암호화폐에 비해 안정성이 높고, 결제 시스템에도 유용할 수 있다. 혼이 펀드매니저로서 선택한 첫 업체도 이런 ‘안정적 화폐’를 발행하는 회사였다.
번역 김화윤 whayoon.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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