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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세이] '너의 결혼식' 미소 속에 비친 내 첫사랑의 그림자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의 ‘인연’을 읽으며 먹먹한 가슴으로 한숨을 내쉬지 않는 남자가 어디 있을까. 누구나 한번씩은 해봤을 가슴앓이. 부끄럽기도 하고 때로는 찌질하기도 했으나 그조차 사랑이라 믿었던 시절 이야기. 그 웃기면서도 아련해져 오는 몹쓸 첫사랑 이야기가 영화로 눈앞에 나타났다.

‘너의 결혼식’은 10대부터 30대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첫사랑인 남녀의 연애담을 ‘지극히’ 남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고3 여름, 두 남녀가 처음 만난다. 전학 온 승희(박보영)에게 반해 졸졸 쫓아다니는 우연(김영광). 세상을 등진 듯 승희는 누구에게도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런 그녀를 위해 담치기를 돕고, 떡볶이 공세를 펼치고, 싸움을 안한다는 등 혼자 약속하고 혼자 지키는 우연은 밉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마음이 열리나 하는 찰나, 승희는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이듬해 ‘대학은 무슨’ 자포자기하며 닭 튀기던 우연 앞에 대학 홍보책자 하나가 툭 던져진다. 표지 속에 탁 박혀있는 승희. 그는 결심한다. 다시 그녀를 찾아가야겠다고. 그렇게 일년이 흘러 둘은 캠퍼스 앞 떡볶이집에서 다시 재회한다. 풋풋함은 뺀 진짜 연애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고등학생 시절의 에피소드들은 2000년대 초반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감이 있다. 조연들의 캐릭터는 정형화됐고, 웃음코드는 ‘말죽거리 잔혹사’를 의심케 할 만큼 옛날 코드다. 때문에 두 주인공이 끌어가는 흐름으로 환승하기 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깔깔대며 웃다가 주인공들이 20대로 넘어가고 나면서부터는 사정없이 심장을 찌르는 흐름으로 연결된다.

이들의 20대는 현실연애와 직결된다. 마음만 앞선 질투와 고백, 세상에 둘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단순한 행복, 그리고 어김없이 이어지는 오해와 위기까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그리고 상대를 배려하지 못한 남자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하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를 어느정도 알았다고 느꼈을 때쯤 상대도 훌쩍 커버렸다.

영화는 내내 ‘사랑은 운명이냐 타이밍이냐’를 두고 저울질한다. 아리까리한 것이 이도 저도 다 맞는 말처럼 다가온다. 네가 애인이 있을 때는 내가 없고, 내가 있을 때는 네가 없다. 내가 험한 시기를 보낼 때 너는 더 험한 일과 마주해있는. 사랑이라는 것도 서로간에 쿵짝이 잘 맞아야 한다. 한쪽만 쿵쿵 짝짝대면 방방 뛰어봐야 잘 되는 법이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만나야 하는 세상은 달라진다. 10대 시절 아련했던 사랑은 그 감정만 기억에 남아 꼭 술마실때만 되새김질하듯 떠오른다. 남에게 안 들키려고 작은 편지 한 조각 건네는데도 노심초사하던 손에는 어느새 ‘까똑 까똑’이 쉴 새 없이 울린다. 너 먼저 가라며 시내버스 몇 대를 그냥 보내던 정류장 앞에서는 차에 에어컨 틀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 세상이 달라지면 추억과 마음만 남아 이따금씩 사무친다.

박보영과 김영광의 호흡은 아주 잘 들어맞는다. 박보영은 냉소적인 아이에서 ‘뽀블리’로, 또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적응해가는 여성의 성장기를 자신의 몸에 꼭 맞췄다. 김영광 역시 집착으로 보일 수 있던 승희에 대한 감정을 특유의 미소를 통해 순수함으로 표현해냈다. 두 사람의 20대 후반 이후 모습은 친구들끼리 술마시다보면 꼭 나오는 레퍼토리를 그대로 재현해놓은 듯 하다.

주인공과 비슷한 연애를 겪은 친구들은 꼭 술취해 한명이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며 ‘보고싶다’ 하면 “감당할 수 있겠냐”고 말한다. 10대와 20대 초반, 그리고 사회 초년생과 결혼까지…. 몇 년에 한번씩 만날 때마다 그와 담을 쌓아가는 느낌이었단다. 각기 다른 사람을 만난 것처럼, 10여 년이 넘는 시간은 그들을 그저 좋았던 추억으로만 기억되도록 만들었다.



피천득 선생의 나이가 아흔 셋이던 2003년, 수필 ‘인연’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아사코가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아주 기뻐했다. 제작진이 ‘만나고 싶지 않냐’고 묻자 피 선생은 “살아있다는 소식만으로도 기쁘다”고 말했다.

여담으로 녹화가 끝난 후 선생은 “나중에라도 제작진이 새로 찾은 사진을 받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고 전해 들었다.

남자들의 첫사랑이 다 그렇다. 만나고 싶지는 않지만, 잘 살았으면 좋겠고, 사진이나 있으면 한번쯤은 보고 싶은 그 애잔함. 이런 감정을 안고 극장을 나와 애인과 다투는 관객이 많지는 않을지 걱정부터 앞서는건 그만큼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최상진기자 sestar@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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