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잡고 흔들면 후두둑 물방울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저 송글송글한 것은 물방울인가, 땀방울인가, 빗방울인가. 열대야 넘기고 새벽에 만나는 이슬인가, 혹은 수고하는 이를 위해 내민 물잔 겉에 맺힌 위로의 물방울인가. 날 선 얼음은 금세 녹아버리고 뜨거운 김은 쉬이 사라진다. 쨍하고 팽팽한 긴장감을 내뿜는 저 알알이 물방울을 그저 말캉하게 볼 게 아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비누방울이나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고픈 어린아이의 구슬처럼, 눈에는 보이지만 쉽게 가질 수 없는 존재다. 이제 막 캔버스 뒤에서 배어난 물방울로 보일 수도, 이내 곧 캔버스 속으로 스며들 물방울로 보일 수 있다. 상관없다. 컵에 든 물을 벌써 반을 마셨거나 아직도 반이나 남았거나의 차이니까.
원로화가 김창열(89)의 1973년작 ‘물방울’이다. 흔하고 쉽게 맺히는 게 물방울이라지만, 그 투명하고 차고 영롱한 기운까지 생생하게 화폭에 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기법만이 아니다. 탱글탱글한 물방울 표면은 물 분자가 웅크리듯 끌어당긴 표면 장력과 주르륵 흘러내리게 만드는 중력 사이에 버티고 있다. ‘충만한 빈 공간’ 같은 역설적 존재다. 저게 물감이지 물이겠나, 가짜다. 그러나 아주 약간의 거리를 확보하고 물러나 본다면 진짜보다 더 깊은 진정성이, 그리고 그 정성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더 들여다보면 흰색과 노란색 등이 교묘하게 그린 맑은 물방울이 거울되어, 그림 앞에 선 사람을 비춰낸다.
1972년 검은 바탕에 오롯한 물방울 하나와 그 그림자를 그린 ‘밤의 이벤트’를 시작으로 무려 47년째, 거의 반세기 물방울만 그린 김창열이다. 왜 그토록 물방울에 집착하는지, 그것이 땀방울인지 눈물인지 혹은 흩뿌린 물인지 배어난 물인지는 화가의 역사가 이야기한다.
김창열은 1929년 평남 맹산에서 태어났다. 첫 손주를 끔찍이 아끼던 할아버지께 다섯 살부터 한자를 배웠다. 그가 붓을 쥔 것은 조부 손에 이끌려 글씨 쓰던 게 처음이었다. 1986년을 전후로 김창열이 천자문 바탕 위에 물방울을 올린 ‘회귀(回歸)’ 연작을 선보인 것은 이때를 더듬은 듯하다. ‘회귀’ 대작은 프랑스 퐁피두센터 등지에 소장돼 있다.
김창열은 그림과 공부 모두 뛰어났다. 소학교 시절 잠시 전학 왔다 떠난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에게 딱 한 번 뺏긴 것 말고는 항상 1등이었다. 광복 직후 그의 고향동네에는 반공 구호 적힌 유인물이 자주 돌았다. 하루는 자습시간에 그 한자를 따라 적다가 끌려가 조사받고 어린 것이 첫 옥살이를 했다. 반공주의자로 낙인찍혀 감시당하는 인물이 됐다. 하루는 평양 인근에 살아 나름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빠른 삼촌이 황급히 달려와 도망치라고, 남쪽으로 달아나라고 했다. 겨우 열여섯 살짜리가 새벽 2시에 집을 나섰다. 잡힐까봐 기차도 못 타고 낮에는 눈에 띌까 밤에만 걸어서 6일 만에 홀로 38선을 넘었다. 월남민 수용소에서 6개월을 지나고서야 기적적으로 아버지와 상봉했다. 죽을 고생한 큰아들이 딱해서, 아버지는 그제야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 반대하겠다고 했다. 미술학원도 허락했고 그 덕에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해 서울대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중학교 동창 180명 중에 살아남은 게 겨우 60명”이라는 노화가는 자신의 살아온 인생이 ‘구운몽’ 같다고 했다. 다섯살 아래 누이를 피난지 수원에서 잃고 무덤 앞에서 종일 울던 날의 눈물이 저 그림 속 물방울보다 많았다.
김창열의 스승은 ‘성북회화연구소’를 운영한 이쾌대(1913~1965)다. 지금은 해금됐지만 ‘월북화가’ 이쾌대의 조수로 일한 경력이 문제가 돼 전쟁이 끝났지만 서울대 복학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군 복무 대신 했던 경찰직에 눌러앉았고 부평 경찰전문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1년 이상 제주에서 피난시절을 보낸 인연이 지금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의 김창열미술관으로 이어졌다. 그런 김창열의 1950~60년대 작품에서는 전후(戰後) 실존주의가 꾹꾹 담겨 있다. 형태도 없이 물감 흔적과 붓 휘두른 화가의 몸짓만 남은 ‘앵포르멜(Imformel)이 그의 초기작을 이룬다. 그 시기, 1965년의 ‘제사’가 마침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근대를 수놓은 그림’이라는 제목의 소장품 특별전에서 전시 중이다. 입 다문 채 소리 죽여 눈물 흘리는 사람이 어른거리는 작품이다. 그림 위쪽에 찍힌 두 점, 그 눈동자에서 그렁그렁한 기운이 전해진다. 다만 아직은 눈물이 영롱하게 영글지 못한 채 찢기고 흔들린 채 전쟁과 가난의 상흔을 더듬고 있다. 이 그림은 김환기·이응노 등과 함께 참가한 1965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출품작이다. 작가가 힘껏 내리그은 붓질이 화면에 그대로 남아있고 군데군데 물감 덩어리가 엉켜 심적 응어리를 대신한다. 그의 찐득한 물감은 이후 점액질이 돼 여기저기 뚫린 구멍에서 배어나는 형상으로 그림이 된다. 이 시기 김창열은 미국에 있었다. 1965년 영국 런던의 국제청년작가대회에 한국 대표로 초대됐고 귀국행 비행기표를 바꿔 뉴욕으로 향했다. 공항에 내릴 때 주머니에는 단돈 4달러뿐이었다. 혈혈단신 월남해 전쟁도 치른 그다. 김환기 등이 그랬듯 넥타이공장에 일하며 살아남았다. 록펠러재단의 장학금으로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판화를 공부했다. 백남준의 도움으로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게 1969년, 이후 파리로 떠났다.
파리 근교 팔레조의 한 마구간을 동료 조각가 문신(1923~1995)과 함께 작업실로 썼다. 문신이 떠나고 혼자 쓰던 시절, 부인이 된 운명의 프랑스 여인을 만났다. 집안의 반대에도 마구간에서 버티던 그녀가 하루는 보따리를 싸길래 이제야 떠나나 했더니 벼룩시장에 옷을 팔아 먹을거리를 마련해 왔다. 그 여인과 하객 없이 둘 만의 결혼식을 했다. 그 가난한 마구간에서 큰아들이 생겼고 ‘물방울’이 탄생했다. 가난했으니 재료도 넉넉지 않아 캔버스 뒷면을 물에 적셔 묵힌 후 물감을 떼어 또 그리는 식으로 재활용하던 시절이었다. 그날 아침도 여느 때처럼 캔버스 뒷면에 물을 뿌리다 햇빛 사이로 찬란하게 반짝이는 물방울을 봤다. 면벽수행 끝에 득도한 사람처럼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다. 1972년 검은 바탕에 단 한 방울로 시작된 물방울은 누른 마포 생지에 두세 방울, 때로는 떼지어 맺혔다. 물방울은 등에 붙은 땀처럼 스미기도 했고 눈물처럼 흐르기도 했다. 살림살이가 나아져 파리 시내에 작업실을 마련했고 1993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성대한 회고전도 열렸다. 한·불 양국에서 훈장도 받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김창열의 ‘눈(雪)’ 작업이 있다. 눈은 또 다른 물방울의 결정체다. 판화를 전공한 그가 10년을 연구해 2008년에 ‘눈’ 연작을 완성했다. 잘 불린 겹겹의 한지 위에 발자국처럼 눈밭 위 물방울 흔적을 새겼다. 이 작품은 2011년 파리 보두앙르봉 갤러리의 ‘눈’ 기획전에 선보여 불어로 눈(neige)이라 불렸다.
“약간의 꿈이 위험하다면, 이를 낫게 하는 것은 꿈을 덜 꾸는 것이 아니라 더 꾸는, 아니 온통 꿈만 꾸는 것이라네. 꿈으로 고통 받지 않으려면, 꿈을 완전히 아는 게 중요하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에 등장하는 화가 엘스티르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조언처럼 김창열은 악몽을 피하지 않고 그 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물방울을 두고 누구는 실제보다 더 리얼하게 묘사하는 ‘극사실주의’라 하고, 어떤 이는 한가지 색조의 화면을 이루니 ‘단색화’라 분류하는 이도 있으나 차라리 ‘초현실주의’였다고 쓰다듬고 싶다. 처음엔 한없이 맑은 헨델의 하프협주곡이나 수상음악을 들으며 감상하던 김창열의 ‘물방울’에 한 개인과 격변의 한국사를 포개다 보면 어느새 시벨리우스 교향곡이 들려온다. 그의 물방울은 해맑기만 한 천상의 물방울이 아니라 끈적이던 피땀을 숱하게 거르고 걸러 얻은 한 방울이었다. 구순의 노화가는 지금도 흔들리는 한 손을 다른 한 손으로 부여잡고 평창동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오늘도 물방울을.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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