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화성시 향남제약산업단지에 위치한 A제약. 연매출 100억원이 넘는 이 회사는 20여종의 의약품을 판매하는 중견 제약사다. 하지만 전체 직원 100여명 중 연구개발(R&D) 인력은 전무하고 대다수가 영업사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연구원 없는 제약사’가 존재할 수 이유는 판매하는 모든 제품이 제네릭(합성의약품 복제약)이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저가 정책과 대대적인 마케팅을 앞세워 경쟁이 치열한 국내 의약품 시장에서 매년 두자릿수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발암물질 고혈압 치료제’ 사태로 복제약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가운데 이번 사고가 정부의 제네릭 육성책이 낳은 ‘예고된 참사’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기회에 제네릭 관련 법규를 대대적으로 손질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불량 복제약이 또 다시 등장해 국민 건강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까지 나온다.
12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국내 제약사뿐 아니라 전 세계 주요국 제약사들도 이번에 논란이 된 중국산 발사르탄 성분을 수입해 고혈압 치료제 복제약을 판매했다. 하지만 한국은 매중단 품목이 115종으로 가장 많다. 캐나다 28종을 비롯해 영국(8종), 홍콩 (2종), 일본(1종) 등서도 판매중단 조치가 취해졌지만 한국과 비교하면 건수가 크게 차이가 난다. 식약처는 지난 7일 중국산 발사르탄 성분을 사용한 고혈압 치료용 제네릭 219종의 판매중지를 내렸다가 이틀 만에 실제 생산을 하지 않거나 위탁생산 등으로 중복된 104종의 판매중지를 해제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에 유독 판매중단 조치를 받은 고혈압 복제약이 집중된 것을 놓고 국산 제네릭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을 내놓는다. 통상 오리지널 합성의약품은 특허가 만료되면 성분이 공개되기 때문에 제약사들은 이에 맞춰 제네릭을 개발해 판매한다. 화학물질로 구성되는 합성의약품은 제조에 쓰이는 성분만 확보하면 사실상 똑같은 제품을 만들 수 있어서다. 오리지널 의약품과 성분과 효능이 동일한 복제약이라는 의미에서 제네릭이라는 용어가 붙는 이유다.
글로벌 제약업계는 한국을 제네릭 개발의 천국으로 꼽는다. 지난 2000년 정부의 의약분업 시행과 맞물려 본격적인 성장궤도에 올랐다. 대체조제가 가능한 제네릭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정부가 지원책을 내놓자 주요 제약사들은 신약 개발에 비해 시장 진입이 손쉬운 제네릭 시장에 너도나도 도전장을 내밀었다. 오리지널 의약품과 동일한 효능과 안전성을 입증하는 마지막 절차인 생물학적동등성(생동성)시험 관련 법규를 완화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도입한 제도가 ‘위수탁 생동’과 ‘공동 생동’이다. 위수탁 생동은 자체적으로 생동성시험을 실시할 수 없는 제약사가 설비를 갖춘 다른 제약사에 위탁하는 방식이다. 의약품 생산설비와 연구인력이 전무해도 버젓이 제약사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여러 회사가 공동으로 생동성시험 비용을 부담하는 공동 생동 역시 무분별하게 제네릭을 양산하는 토대가 됐다.
정부의 제네릭 육성책으로 의약분업 시행 직후인 2001년만 해도 생동성시험을 통과한 제네릭이 186종이었지만 2004년에는 2,555개로 늘었다. 지금도 매년 1,000여종이 생동성시험을 통과한 뒤 정식으로 시중에 유통되지만 독자적인 생동성시험을 거친 제네릭은 200여종에 불과하다.
영세 제약사도 손쉽게 제네릭을 출시할 수 있게 되면서 전문가들은 불량 제네릭이 시중에 유통돼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제네릭은 결국 가격이 제품 경쟁력을 좌우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저렴한 원료를 쓸 수밖에 없고 검증되지 않는 원료에 눈을 돌리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형기 서울대 임상약리학과 교수는 “제네릭 활성화는 약값 인하와 건강보험 재정건전성 확보를 위해 필수적이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제네릭 시장의 진입장벽을 낮춰놨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불량 의약품은 결국 국민 건강권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관련 제도를 조속히 정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성기자 engin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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