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10월26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미 통상장관회의. 당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을 만난 론 커크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안건으로 자동차 분야의 수정과 쇠고기 월령제한 철폐를 요구했다. 우리의 아킬레스건인 농축산물을 협상장에 들고 나온 셈이다.
8년 뒤인 올해의 재개정 협상은 달랐다. 미국이 공식 협상에서 농산물을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미국은 지난해 공동위원회 때 구체적인 품목에 대한 언급 없이 시장접근 개선을 요구했다.
하지만 본게임이 시작되자 변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현 상황에서 미국이 우리나라에 농산물을 추가 개방하라고 하면 쇠고기 분야에 ‘백파이어(back fire·역효과)’가 생길 것을 우려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농업만 놓고 보면 미국은 남는 장사를 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은 농축산물 분야에서만도 73억8,000만달러의 흑자를 냈다. 효자는 쇠고기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미국산 쇠고기 수입 규모는 12억6,000만달러로 전년 대비 21.3%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을 요구하면 미국산 쇠고기에 보복관세나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를 취하라는 여론이 한국 내에 확산되는 것을 우려했다는 얘기다.
이를 고려하면 우리가 이번 재협상에서 생각보다 잃은 게 많다는 주장이 나온다. 당장 글로벌 혁신신약약가제도가 문제다. 정부는 지난달 26일 내놓은 보도자료에서 “글로벌 혁신신약약가제도는 한미 FTA에 합치되는 방식으로 제도 개선·보완에 합의했다”고만 밝혔다. 그러나 USTR는 ‘한국이 2018년 이내에 관련 제도를 수정한다(Within 2018, Korea will amend its Premium Pricing Policy)’고 못 박았다. 우리 정부와 달리 시기를 확정했다.
특히 혁신신약약가제도 개정은 건강보험 재정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약값이 상대적으로 낮다.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신약 가격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44%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혁신적인 신약으로 판정되면 약가를 최대 10%까지 올려받을 수 있게 했다. 지금까지 미국을 비롯한 외국계 제약사들이 우리나라의 혁신신약약가제도가 외국 업체를 차별한다고 주장해온 만큼 이번에 개정이 이뤄지면 건강보험 지출이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최근의 바이오의약품이나 면역항암제 등은 연간 처방금액이 1억원을 넘는 사례도 있다. 전직 통상 분야 고위관료는 “2010년 재협상 때 미국이 사활을 걸고 요구했던 게 약가였다”며 “건보 재정에 부담을 줄 수 있는데다 내정간섭 측면도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아직 해외수출이 없어 영향이 제한적이라고 했던 픽업트럭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번 협상에서 미국은 한국산 픽업트럭 관세철폐 시점을 오는 2041년으로 늦췄다. 하지만 우리가 상반기 내에 가입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미국은 일본에 픽업트럭 관세철폐 기간으로 30년을 제시했다. 미국은 TPP에서 탈퇴한 상태지만 양허협상을 마쳐 지금 분위기대로 TPP 복귀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우리도 비슷한 수준이 적용될 수 있다. 전직 통상 분야 고위관료는 “TPP서는 2051년은 돼야 한다”며 “우리가 TPP에 가입하면 2041년보다 더 늘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자화자찬도 문제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번 협상을 거란의 침입을 물리친 고려 서희 장군의 담판, 독일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에 빗대 설명했다. 하지만 환율 합의 논란, 북핵 문제와 한미 FTA를 연계할 수 있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말을 보면 지나치게 앞서나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밀실주의도 논란거리다. 지난해 말 미국 정부가 한미 FTA 조항에 환율조작 금지를 반영할 것을 요구했다는 지적에 산업통상자원부는 “환율과 관련해 구체적인 사항을 제기한 바 없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환율 합의가 이슈화되자 기획재정부 고위관계자는 “처음에 FTA 수정과 연계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다”며 “그 얘기는 사실 지난해 미 재무부와의 면담 때도 언급됐다”고 시인했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남북미 3자 정상회담에 대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차원에서 미국을 달래는 수준의 합의”라며 “원칙적으로 환율에서 투명성과 논의 채널을 구축하겠다는 합의를 했고 약가 협상은 손실이 커 얻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세종=김영필기자 susopa@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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